[끝나지 않은 전쟁] “北은 패배했지만 中인민지원군은 승리” 자평
입력 2013-07-26 17:38
6·25 최일선 병참기지 단둥을 가다
중국에서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은 ‘영웅 도시’로 불린다.
소위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 기간 중 최일선 도시로 병참기지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중국인민지원군’도 이곳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북한 내 전쟁터로 갔다. 전쟁 기간 중 공헌을 기려 이러한 호칭이 붙은 것이다.
그런 만큼 단둥에는 항미원조전쟁 관련 역사적 유적이 적지 않다. 전쟁 당시 미군에 의해 폭파된 압록강 단교(원래 이름 압록강 철교)가 도심 가까운 곳에 있는가 하면 대규모 인민지원군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가기 위해 강바닥에 나무 말뚝을 박아 만든 압록강 부교도 이곳에 있다.
단둥 시내에서 60㎞가량 떨어진 허커우춘(河口村)에는 마오쩌둥(毛澤東) 전 주석의 장남으로 6·25 전쟁 당시 전사한 마오안잉(毛岸英)의 동상과 마오안잉 학교가 세워져 있다.
허커우춘에는 허커우 단교(원래 이름 청성교)도 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으로 들어가면서 통과했던 콘크리트 다리로 역시 미군 폭격으로 북한 쪽으로는 끊겨 있다. 여기에다 단둥시내 잉화산(英華山)에는 중국에서 유일한 항미원조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지난 24일 오후 압록강 단교에는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다. 방학을 맞은 학생들과 변경 지역 관광에 나선 타지 사람들이 다수였다. 다리 위 양쪽 난간에는 중국군의 북한 출병과 미군의 폭격 상황을 사진과 함께 설명한 대형 액자가 쭉 걸려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이끄는 병력이 이 다리를 건넌 건 1950년 10월 19일. 그로부터 20일 만인 11월 8일 미군 B-29 폭격기에 의해 북한 쪽 다리가 폭파됐다. 중국 쪽 다리 끝 부분에서 북한 신의주 쪽을 바라보던 지린성 허룽(和龍)에서 왔다는 조선족 할머니들은 그늘진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보다 앞선 10월 1일 북한 김일성 주석은 인천상륙작전(9월 15일) 뒤 위기에 처한 전세를 수습하기 위해 마오쩌둥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친필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항미원조기념관 1층 첫 번째 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편지는 다급한 상황을 말해주듯 틀린 글자를 그대로 고쳐 쓰거나 빠트린 글자를 행간에 끼워넣기도 했다. ‘존경하는 모택동 동지 앞’으로 시작하는 편지는 “미군 침략군이 인천에 상륙하기 전에는 우리의 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볼 수 없었습니다”라면서 특히 미군 공군력에 속수무책인 상황을 토로했다. 자체적으로는 위기를 극복할 힘이 없다면서 ‘친애하는 모 동지시여’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청성교를 찾은 23일은 내내 비가 내렸다. 이 다리는 중국군이 북한 청성으로 들어간 곳. 중국군의 북한 출병 3대 통로 중 하나였다. 다른 두 곳은 압록강 단교와 지린성 지안(集安)에서 만포로 건너가는 철교였다.
청성교 난간에 부착된 대형 액자에는 6·25가 북한에 의해 발발했음을 적시해 눈길을 끌었다. 즉 “1950년 6월 25일, 조선인민군이 남진(南進)을 시작해 조선전쟁이 발발했다”고 썼다. 남침은 중국 관영 매체도 인정했지만 중국 정부가 이를 공식화한 적은 없다. 역사 교과서는 “내전이 발발했다”고만 적고 있다. 항미원조기념관에서도 내전 발발로만 표현했다.
같은 날 단둥시 전안(振安)구 앞 압록강에 위치한 압록강 부교는 최근 계속된 비로 수위가 높아져 나무 말뚝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는 중국군 모습을 담은 유명한 흑백 사진의 현장이다. 강변에 세워진 인민지원군 동상이 없었다면 지나칠 뻔했다.
지금은 20대 여성이 이곳 도로변에 파라솔을 세워놓고 북한 지폐 등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항미원조전쟁 승리 60주년’을 맞았지만 단둥 시민들 가운데 이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아 보였다.
단둥=글·사진 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