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도라산역 평화음악회…총대신 악기, 참전용사 후손들 감사·보음의 ‘평화 연주’

입력 2013-07-26 18:03 수정 2013-07-26 23:49


하얀 드레스의 소프라노 신영옥씨가 무반주로 노래를 시작했다. 곡목은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여리고 고운 가락이 이어지자 미국에서 온 참전용사 벤 서린(81)씨는 고개를 숙였다. 녹색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휠체어에 의지한 그는 “포탄이 날리던 전장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그립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든 조지(80)씨는 눈을 감았다. 19살 어린 나이로 영국을 떠나 바다 건너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생사의 고지를 넘어야 했던 60년 전 그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노래가 끝나자 힘차게 박수를 치던 조지 씨는 “두렵고 힘든 경험이었지만 다시 돌아올 곳이 생겨서 참 기쁘다”고 말했다.

26일 저녁 7시. 대한민국의 최북단 역이자 북한의 첫 관문 역인 경기도 파주시 도라산역은 현악기가 내는 화음과 어우러진 노래 소리로 가득 찼다. 국가보훈처와 한국전쟁기념재단, 경기도가 주최한 ‘정전 60주년 기념 유엔 참전국 교향악단 평화음악회’에 21개국에서 온 6·25전쟁 참전용사 300명과 국내 참전용사 등 관객 450명이 공연을 감상했다. 음악회는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고 참전용사에게 감사를 전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음악회는 한바탕 화합의 장이었다. 시작 전부터 참전용사들은 국적을 떠나 서로 손을 잡고, 부둥켜안았다. 1953년 벌어진 금성전투 당시 소대장이었던 김학수(83)씨는 객석을 돌아다니며 외국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말은 안 통해도 손짓 발짓으로 웃음이 번졌다. 김씨는 “남을 위해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동지들”이라고 했다.

화합은 객석을 넘어 무대로 이어졌다. 한국전쟁 참전국에서 온 연주자 25명과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연주자 5명, 국내 연주자 29명은 ‘유엔 참전국 교향악단’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무대에 섰다. 이 59인조는 로시니의 오페라 ‘윌리엄텔 서곡’부터 베르디의 오페라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서곡’까지 다채로운 음악을 들려줬다. 바이올린을 맡은 앤 크리스틴 판코일리(벨기에)씨는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고아가 됐다”며 “전쟁의 아픔을 치유하는 연주를 하러 한국에 왔다”고 말했다. 첼로 연주자 김유설(28·여)씨는 “목숨을 걸고 타국에 온 분들께 은혜를 갚을 수 있어 뿌듯하다”고 했다.

KBS 조우종·이지애 아나운서의 사회로 꾸며진 무대는 오스트리아 빈 국립극장 전속 가수인 테너 정호윤, 세계적인 트롬본 연주자 키이스 디르다 등 정상급 음악가들이 함께했다. 블라스티밀 피첵 체코 국방장관을 비롯한 참전 21개국 정부 대표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한국전쟁기념재단 김인규 이사장은 “60년 전 총칼을 들고 한국에 왔던 참전용사의 후손들이 악기를 들고 평화를 연주하는 뜻 깊은 자리였다”며 “이번 음악회가 한반도 평화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대한민국은 유엔 참전용사의 희생과 공헌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했다. 딸과 함께 한국을 찾은 참전용사 데럴 아서(91·미국)씨는 “멋진 추억을 만들어 준 한국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도라산역(파주)=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