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철책선 지키러 철책선 안으로… “우리에게 빈틈은 없다”

입력 2013-07-26 17:43


[앵글속 세상] 그후 戰線은… 동부전선 을지부대를 가다

# 첫 날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십시오”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를 벗어나 민간인 통제선 위병소에서 출입절차를 마치자 초병이 일행에게 건넨 인사말이다. 백화점 직원들에게서나 들을법한 인사말을 강원도 첩첩산중에서 병사에게 들으니 조금은 당황스럽고 의아했다.

동부전선에서도 험하기로 소문난 이곳은 육군의 대표적인 산악부대 12보병사단의 작전지역이다. 지리한 장마 속에 햇살이 간간이 얼굴을 내민 지난 17일 민통선 내부 안내를 맡은 김동원 중위(사단 공보장교)가 새로 포장된 아스팔트길 위에서 부대의 자랑거리를 소개했다.

초병의 인사말에서 보듯 따뜻한 병영생활을 위해 ‘정겨운 인사말 나누기 운동’과 생활관에서 소망을 담아 각자의 화분을 키우는 ‘1인 1생명 가꾸기 운동’을 전개해 큰 효과를 거뒀다고 김 중위는 덧붙였다.

험한산으로 이어진 동부전선에서도 가장 험준한 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12사단은 1952년 11월 8일 한국전쟁 중에 창설됐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을지문덕 장군의 진취적 기상을 계승하라는 의미에서 전군 최초로 역사인물의 이름을 부대명으로 붙여줬다.

전쟁 중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강원도 면적의 4분의 1을 지켜냈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 부대 병사들의 자부심도 크다. 인제군을 가리켜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던 옛말은 이제 “(이렇게 좋은 곳을) 인제와서 원통하다”로 바뀌었다.

잘 포장된 도로를 한참 달려 5부 능선 정도를 넘어서자 각 소초(GOP) 이정표를 따라 난 오래된 시멘트 길 위로 이따금 멧돼지 가족과 고라니 등이 차 앞을 가로 지른다. 철조망에 걸려있는 ‘미확인 지뢰지대’ 표시가 전쟁의 상흔처럼 곳곳에 걸려있다.

사단본부를 출발해 1시간 반 만에 정상에 위치한 단결대대 GOP에 도착하니 남강의 물줄기가 햇빛에 반짝거리며 한눈에 들어왔다. 파란하늘과 뭉게구름 아래로 멀리 금강산에서 시작해 비무장지대(DMZ)를 넘어 북으로 흐르다 다시 남으로 방향을 틀어 흐르는 분단의 물길이다.

남북의 허리를 갈라놓으며 백두대간의 등줄기에 이중, 삼중으로 깊은 상처를 내 놓은 철조망이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분단의 아픔을 알 리 없는 까마귀들만 정적을 깨며 자유롭게 철조망을 넘나든다.

소초 안의 식당에선 막 경계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병사들이 신형 LED TV로 즐겨 보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밝은 표정으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소초를 방문한 군종장교 강필구 목사는 장병들의 건강과 안전을 기원하며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소초를 떠나 온몸이 제 멋대로 흔들리는 비포장도로를 한참 이동하자 도로 끝 철조망 옆으로 직벽에 가까운 까마득한 계단이 버티고 서 있었다. 계단이 4000개가 넘어 ‘사천리’라 불리는 이 지역은 전군에서 유일하게 차량이 진입할 수 없는 곳이다. 전쟁 전에는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목이었지만 지금은 철조망에 길이 막혀있다.

# 이튿날

멋진 일출과 운해를 기대하며 이른 새벽 서둘러 군 숙소를 나섰다.

안개 자욱한 산 아래를 벗어나 마지막 경비초소를 통과한 후 정상에 오르자 검은 구름 띠 사이로 붉은 아침 해가 솟아오른다. 멀리 을지전망대가 서있는 좌측으론 운해가 산자락을 감싸며 높고 낮은 봉우리마다 솜이불을 덮은 듯 장관을 연출했다.

운해와 농담(濃淡)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아름다운 능선과 철조망이 갈라놓은 상흔의 DMZ. 조화롭지 않은 이 풍광이 오히려 ‘대한민국에만 있는 고유한 풍경이 아닐까’란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하루 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 속에 안내 장교와 철책을 오르내리며 분단의 현장을 돌아보고 어둠이 내릴 무렵 수색대대 장병들이 DMZ 안으로 이동하는 통문(通門)에 이르렀다.

수색대 병사들이 얼굴에 위장크림을 바르고 완전군장 차림으로 지휘관의 지시상황을 주의 깊게 듣고 있었다. 수색대 막내인 이지훈(21) 일병은 “짧은 군 생활을 최전방 수색대대에서 근무하고 싶어 자원했다”면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밤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지만, 조국의 밤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병사들의 눈매엔 비장함마저 감돈다. 휴식시간 천진난만하게 웃고 장난치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굳게 닫혔던 통문이 열리고 조명에 비치는 빗줄기는 점차 굵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수색대원의 뒷모습으로 든든함과 가슴 저림이 교차하고 있었다.

인제=글·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kkkwa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