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이명희] 박근혜의 봉숭아학당
						입력 2013-07-25 17:33  
					
				“장관들은 다 어디 갔나… 소신도 줏대도 없이 대통령 지시만 복창해선 곤란하다”
노무현정부 시절 재정경제부 차관을 지낸 모 인사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발언으로 청와대와 자주 부딪혔다. 소주세율 인상을 추진하던 당시 정부가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없던 일로 했다. 그러나 그는 “맥주세율을 낮추는데 소주세율을 못 올리면 재원확보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다”며 “국민들의 양해를 구한 뒤 재추진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가 청와대로부터 경고까지 받았다. 아파트 값이 폭등하면서 분양가 상한제와 분양원가 공개 요구가 쏟아졌지만 시장주의자인 그는 “민간 아파트 분양가 규제는 필연적으로 공급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청와대나 여당과 각을 세웠다. 그러다보니 기자들이나 공무원들은 그를 볼 때면 사표 써놨냐고 묻곤 했다.
성장론자인 이명박정부의 강만수 전 초대 기획재정부 장관은 수출 대기업이 살아야 중소기업과 서민들도 산다는 ‘트리클다운(낙수효과)’을 주장하며 고환율 감세정책을 펴 논란을 일으켰다. 윤증현 전 기재부 장관은 서비스산업 선진화를 위해 영리병원을 도입해야 한다고 전재희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자주 설전을 벌였다.
그런데 박근혜정부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통령의 ‘깨알 훈시’가 내려오면 모범생 장관들은 열심히 받아 적고, 복창하기 바쁘다. 어디에서도 “이의 있습니다”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창조적인 아이디어를 내놓는 장관은 언감생심이다.
‘책임총리제’로 힘을 실어주겠다던 총리는 있는지 없는지 가끔씩 신문에 실리는 국무회의 사진이 없다면 까먹을 정도다. 처음부터 자질론에 시달렸던 경제부총리는 열심히 하는데 성과가 없고, 군기반장 노릇도 못한다. 정작 풀어야 할 핵심규제는 국회나 다른 부처와 싸울 게 뻔하다며 쉬운 것만 하려고 하고, 기업들이 세무조사 때문에 죽겠다고 아우성칠 때는 침묵하고 있다가 대통령이 “경제민주화가 기업을 옥죄어선 안 된다” “경제민주화는 마무리단계”라고 지침을 내려주고 나서야 움직인다.
부동산 취득세 인하 문제도 컨트롤 못하는 반장이 마뜩잖고, 교체론까지 나왔지만 선생님은 “참 잘했어요. 앞으로도 잘해주세요”라며 다시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지원사격에도 불구하고 ‘3억원 이하 주택만 1%로 인하’를 고수하는 친박계 실세인 안전행정부 장관에게 여전히 밀리는 모양새다.
다른 부처 장관들도 핫바지이긴 마찬가지다. 금융위원회는 대선 공약을 무시하고 밥그릇만 챙기는 ‘꼼수’를 부렸다가 대통령이 “이게 아닌데”라고 하자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방안을 내놨다. 영훈국제중이 돈을 받고 대규모 성적조작을 한 사실이 드러나 국제중 지정취소 여론이 빗발치는데도 곤란하다던 교육부는 대통령이 한마디 하고 난 뒤에야 분주해졌다. 사립대학들의 직원 연금 대납 환수문제나 한국사 수능 필수과목 포함 문제도 대통령이 해결사였다.
장관들은 다 어디 갔나. 자기가 맡은 전문분야에 대한 문제의식도, 소신도 찾아보기 어렵다. 오죽하면 찜통더위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에어컨 좀 틀자’고 얘기하는 장관이 한 명도 없을까.
아니다. 소신 있는 이의제기가 한번 있기는 했다. “선생님이랑 너랑 친하니까 네가 얘기 좀 해보라”고 친구들이 옆구리를 찌르자 이경재 방송통신위원장은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골프 좀 치게 해 달라”고 민원을 했다. 선생님은 빙긋이 웃기만 했다. 나중에 비서실장을 통해 전달된 선생님 말씀은 “휴가 때, 문제 되지 않을 사람과, 자비로 쳐도 된다. 되도록이면 스크린골프를 권한다”는 거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제나라 장군 사마양저는 왕이 총애하는 신하 장고를 사면시키라는 명령을 어기고 군율에 따라 처형하면서 ‘군령유소불수(君令有所不受·군주의 명령도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박근혜 대통령의 봉숭아학당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만기친람(萬機親覽)형 선생님 말씀에 반론도 펴고, 배짱 있는 장관도 나와야 나라가 발전한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