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아리타도자기

입력 2013-07-25 17:37


오랜만에 후배와 서촌 나들이에 나섰다. 식혜 한잔 사들고 마실 나온 동네사람처럼 걷다보니 예쁜 찻잔들로 가득한 가게가 보였다. 진열창 너머 형형색색의 고운 자태에 감탄사만 연발하고 서 있는데 가까이서 보면 더 예쁘다며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다. 대부분이 오륙십년쯤 된 수입구제 상품들. 금박은박의 장식과 울긋불긋한 무늬의 찻잔들 속에서 옥빛이 도는 뽀얀 찻잔 하나가 유독 눈에 들었다. 함박꽃처럼 활짝 핀 찻잔의 둥근 곡선이 눈에 착 감기는 것이 참 고왔다. 궁금한 마음에 찻잔을 들어 바닥을 보았다. 낯익은 파란 글씨. 낙인처럼 찍혀 있는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정체불명의 상실감에 조용히 찻잔을 내려놓고 가게를 나왔다.

아리타도자기(有田燒). 한국사 교과서를 보면 일명 ‘도자기 전쟁’인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다는 내용이 나온다. 덧붙여 그들이 일본 백자의 시조이며 세계적인 도자기 수출국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배웠다. 고등학교 때는 이 부분에서 막연한 자긍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게 다였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 일본에서 본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서 우리가 애써 무시하고 건너 뛰어버린 400여년의 과정, 그 노력의 역사를 보았다.

일본 백자의 창시자로 신사에 모셔진 이삼평, 무사도 아닌데 영주로부터 이름까지 지음 받은 심해종전, 그리고 그의 아내이자 아리타도자기400년사에 유일하게 이름을 남긴 여성 백파선에 대한 이야기. 조선 땅에서는 그저 도자기 굽는 공인이었던 그들이 그곳에서는 장인으로 대우받으며 살았고, 정권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서 최고 수준의 기술을 꽃피웠다. 이후 일본 도자기는 중국의 도예까지 받아들여 유럽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되고 프랑스의 리모주, 독일의 마이센 같은 명품도자기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왜란 이후 조선 도자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16세기 말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과학과 예술의 결합체인 분청사기의 명맥이 끊어지고 쇠락의 길을 걷게 되지만 그 누구도 빼앗긴 사기장들을 되찾아오려 하지 않았다. 규슈에 가면 그렇게 돌아오지 못한 조선 사기장들이 그들의 조상이 되어 그곳에 묻혀 있다.

요즘 한국사 교육 강화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과거에 투영된 현재를 보는 것이 역사교육의 목적이라 한다면 아리타도자기의 역사는 균형 잡힌 시각과 바른 역사인식을 갖게 하는 좋은 교재가 될 듯하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