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1672억원이 문제가 아니다

입력 2013-07-25 17:33


전두환 전 대통령을 원고지 몇 장으로 논하기는 어렵다. 그는 1980년대 공포스러운 권력자였고, 1996년 법정에서 내란 등의 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죄인이었으며, 이후 수십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닌 은둔의 보스였고, 2003년에는 그 유명한 ‘29만원의 사나이’가 된 문제적 인물이다.

요즘 그는 미납 추징금 1672억원 문제로 검찰과 여론의 칼날 앞에 서 있다. 일가친척 모든 재산을 뒤져서라도 전부 추징해야 한다는 게 국민 여론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게 맞나. 일방적 여론몰이 아닌가’라는 목소리는 설 자리가 없다. 검찰은 전방위 작전을 펼치고 있다. 미술품, 증권, 통장, 보험, 부동산, 연금 등 의심되는 모든 재산을 샅샅이 훑고 있다.

검찰 간부들은 “시간이 너무 흘렀고, 비자금과의 연관고리 입증이 쉽지 않다”고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아마도 상당액을 추징할 수 있을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의지를 밝혔고, 채동욱 검찰총장이 연일 독려의 메시지를 내고 있다. 검사 8명이 투입됐고, 국세청과 각종 기관들도 총동원됐다. 검찰이 작심하면 그 칼날을 피해낼 사람은 많지 않다. 전 전 대통령 일가가 그런 운명에 처했다.

검찰이 1672억원을 모두 추징하면 그를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을까. 전 전 대통령 측 민정기 전 비서관은 언론에 “추징금을 자진 납부하더라도 국민이나 정치권에서 그걸로 끝이라고 하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옳은 말이다. 어쩌면 돈은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우리나라 미납 추징금 1위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고, 2위는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비자금을 관리했던 김종은 전 신아원 회장이다. 전 전 대통령은 3위다. 김 전 회장은 무려 22조9460억원의 미납 추징금이 있다. 여론은 김 전 회장에게는 전 전 대통령만큼 가혹하지 않다. ‘전두환’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헌정 질서를 붕괴시켰던 12·12 군사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의 주동자다. 대법원은 1997년 전 전 대통령에게 내려진 무기징역형을 확정했다. 법적인 결론은 내려졌지만, 아직 국민들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검찰 수사에 대한 국민들의 뜨거운 호응은 이에 대한 증거다. 전 전 대통령이 12·12와 5·18을 매듭짓지 않는다면, 추징이 끝나더라도 비슷한 일들은 끊임없이 반복될 뿐이다.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는 1970년 서독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폴란드를 방문했다. 그는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후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침에 길을 나설 때 진심을 전달할 수 있을 무언가는 표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이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고 회고했다.

지금 전 전 대통령이 고민해야 할 지점은 비자금에 대한 해명자료가 아니다. 브란트 전 총리의 사례가 아닐까. 전 전 대통령의 사과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광주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5·18 기념재단 송선태 상임이사는 최근 기자와의 통화에서 “비자금이 아니라 사죄가 중요하다. 전두환씨가 자연인의 생을 다하기 전에 정치군인들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진실되고 정중히 사과할 것을 언제든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전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83세다. 여러 가지를 고민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

남도영 사회부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