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이 어디냐고요? 물복숭아 떠내려오는 곳이죠… 전윤호 시집 ‘늦은 인사’

입력 2013-07-25 17:50


전윤호(49·사진) 시인에게 고향인 강원도 정선은 상처의 땅이다. 어린 날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와 이별해야 했던 그는 그 상처가 도질 때마다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오래 침묵해야 했다. 그의 고향에서는 까닭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은 모두 도원(桃園)으로 갔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고 싶었다/ 떠나는 모습을 기억도 못하는/ 어린 나를 두고 사라진/ 어머니가 보고 싶어 보채면/ 사람들은 도원에 마실 간 거라고/ 실컷 놀고 나면 내가 생각나/ 쪽배 타고 돌아올 거라고// 우리 동네에서/ 무덤도 없이 사라진 사람은/ 도원으로 놀러간 거라고 했다”(‘그곳’ 부분)

그런데 도원으로 갔다는 사람들은 모두 죽음의 문이기도 한 바다나 소(沼)를 거쳐 갔다. 그렇기에 시인이 기억하는 상상의 공간으로서의 도원은 실제적 장소로 변환될 경우 상처와 고통을 주는 곳으로 변한다. 상상과 실제 사이에 가로놓인 이중적 의미의 도원을 떠나 타향을 헤매며 살아온 것도 이 때문인데, 한편으로 시인은 도원을 영영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전윤호의 네 번째 시집 ‘늦은 인사’(실천문학사)는 도원이란 비단 시인만의 자폐적 공간이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공간임을 알려준다. 이제 시인에게 남은 건 그게 상처든 고통이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정직하게 붙드는 일일진대, 그 서정의 핵심은 이 자폐적 미학의 시대에 휘황찬란한 수사를 버리고 담백한 고백의 어조로 자신의 상처를 위무한다는 데 있다.

“첫차 타고 떠나려고 앞강에서 머리 감다/ 물복숭아를 건졌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꽃// 꽃밭 찾으려고/ 안개 속으로/ 무릎 적시며 걸어갔다/ 기차역과는 반대편// (중략)// 너무 멀리 왔을까/ 돌아보려다 신발이 벗겨졌다”(‘첫차’ 부분)

일찍 이별한 어머니가 좋아했다는 물복숭아는 별로 화려하지 않은 꽃이다. 그런 물복숭아만큼만 그리워하는 절제된 슬픔은 지나친 과장의 우리 시대에 크나큰 미덕으로 다가온다. 이런 시는 또 어떤가. “여울에 앉아/ 낚싯대를 잡고 있다/ 물살에 떠다닌 내 생애가/ 찌에 얹혀 있다/ 우수수 옥수수 머리를 밟으며/ 푸른 바람이 자꾸 지나간다/ 손으로 전해오는/ 나를 끌고 가는 시간의 묵직함/ 좀 더 기다려야 하리라/ 나는 이 밤을 바쳤지만/ 메기는 일생을 걸고 있다”(‘메기 낚시’ 전문)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