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여성 킬러 연민에 눈뜨다… 구병모 신작 장편소설 ‘파과’
입력 2013-07-25 17:49
“아이보리 면 모자로 잿빛 머리를 가리고 작은 꽃무늬가 인쇄된 티셔츠에 수수한 카키색 바람막이 점퍼와 검정 일자바지 차림을 하고 짧은 손잡이의 중간 크기의 갈색 보스턴백을 팔에 건 이 여성은 실제 65세이나 얼굴 주름 개수와 깊이만으로는 일흔 중반은 넘어 보인다.”(10쪽)
소설가 구병모(37)의 신작 장편 ‘파과’(자음과모음)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인상착의이다. 겉모습은 평범한 60대 중반의 노부인이지만 실상은 그들의 언어로 ‘방역’이라 부르는 청부살인을 업으로 하는 여자의 이름은 ‘깨진 손톱’을 의미하는 ‘조각(爪角)’. 어느덧 업계의 대모 위치에 이른 프로페셔널이다. 여성으로서의 삶 같은 건 눈 딱 감고 외면해왔던 그에게 어느 순간 변화가 찾아온다.
느닷없이 ‘타인’이 눈에 들어온 것. 버려진 늙은 개를 데려다 키우거나 폐지 수집하는 노인의 리어카를 정리해주거나 심지어 ‘방역’ 의뢰인의 눈에서 슬픔과 공허를 읽어내기도 한다.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런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176쪽)
‘신속, 정확, 치밀’을 모토로 하는 방역업에서 연민이 느껴진다면 은퇴 시점인 것이다. 게다가 까마득한 후배인 ‘투우’라는 녀석은 유독 눈엣가시처럼 군다. 투우가 자신이 의뢰받은 구역에 모습을 비추기 시작하면서 조각은 투우의 행동이 악의적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투우는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가정부의 뒷모습을 잊지 못하는데,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바로 ‘잊어버려’였다. 그런 투우가 아버지의 사건에 얽힌 서류를 찾아낸 후 마침내 둘은 불꽃 튀는 맞대결을 벌인다. “투우는 슬슬 부아가 끓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조각의 눈에서 이기겠다는 생각 없이 가능한 한 시간을 끌겠다는 의도를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확인한 순간 그는 모욕감과 함께 돌연 마음이 고요와 공허로 가득해지며, 그 무게만큼 자신의 내부에서 아직 이름과 형태를 규정하지 못했음에도 묵직하게 얹혀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소리를 듣는다.”(312쪽)
작가는 살인기계처럼 살아가던 조각이 노년에 접어들어 너무나도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감정에 맞닥뜨리게 되는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려낼 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흡인력 있는 스토리텔링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킬러를 내세운 스릴러물’이라는 선입견을 깨뜨리고 더 넓은 문학의 지평으로 나아간다. 그것은 상하고 부서져 사라져가는 존재의 운명일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네일 아트 숍에 들린 조각이 자신의 깨진 손톱 위에 붙인 인조손톱을 쳐다보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 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332쪽)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