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전작권 전환 제대로 해야
입력 2013-07-24 17:53
1978년 11월 7일 서울 용산 미 8군 영내에서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과 헤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참석한 성대한 기념식이 있었다. 한미연합사령부 창설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박 대통령은 “한미연합사가 발족한 것은 미 지상군의 일부 철수에도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억지하겠다는 한·미 양국의 확고부동한 결의의 표명”이라고 강조했다.
초대 사령관 존 베시 미군 대장에게 부대기를 수여하는 박 대통령의 표정은 결연했다. 그럴 만했다. 50년 7월 14일 6·25전쟁 당시 고(故)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大田)협정’으로 불리는 서신을 통해 유엔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작전통제권을 넘긴 뒤 28년 만에 한·미 양국이 공동으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체제로 전환됐다. 유엔군사령부는 6·25전쟁 후에도 우리군에 대해 작전통제권을 행사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군과 공동으로 작전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구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의미가 컸다.
우리 군이 공동작전통제권을 확보하게 된 계기는 76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발생한 미루나무 도끼 만행사건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시야를 방해하는 미루나무를 베려던 미군 2명을 무참히 살해했다. 대응작전인 ‘폴 번연’ 작전은 계획부터 시행까지 한·미 공동으로 진행됐다. 작전 수행을 위해 JSA에 한국군 특전대원 40명이 투입됐고 경비구역 밖에는 만일의 사태 시 특전대원을 구출할 미군이 배치됐다. 괌에서 날아온 전략폭격기 B-52 편대가 공중지원작전을 펼쳤다.
작전은 성공했다. 한·미군수뇌부는 한반도에서 모든 작전을 유엔군사령부가 독단적으로 지휘할 것이 아니라 한·미 연합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한국군의 작전수행능력이 인정받았고 또 한국군의 요구사항이 반영될 수 있는 통로가 만들어진 셈이다.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한미연합사를 창설해도 운용은 미군이 주도할 텐데, 유엔사와 무슨 차이가 있냐는 지적도 있었다. 한국군 대장이 부사령관이 된다 하더라도 연합사가 한반도 방어정책과 계획을 세우고 실행까지 독점하면 우리군의 독자적인 작전능력이 약화된다는 비판도 컸다.
연합사는 박 대통령의 기대처럼 강력한 전쟁 억지력이 됐다. 한국군은 주한미군과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면서 미군의 숙련된 작전계획과 첨단무기운용능력을 전수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잃은 것도 적지는 않았다. 북한 문제를 놓고 갈등이 불거지기도 했고 공동작전통제권 행사라고는 했지만 사실상 미군이 주도해 우리군이 독자적인 작전계획 수립 능력을 쌓을 기회도 적었다. 이 때문에 87년 노태우 대통령은 ‘전작권 환수’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고 국방부는 90년과 92년에 각각 95년과 97년을 전환 목표연도로 한다는 안을 검토했다. 주권국가로서 당연한 요구이기도 했다. 한국군의 능력도 향상됐다.
문제는 2007년 정부가 충분한 사전 점검과 한반도 안보상황에 대한 냉철한 분석 없이 전작권 전환 목표시한을 결정한 것이다. 우리군이 주도적으로 한반도 안보상황을 책임지기까지는 준비해야 할 것이 많다. 정보자산을 비롯한 전력증강은 1, 2년 내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북한의 위협 역시 단기간에 해소될 사안은 아니었다.
우리군의 이행노력도 미흡했다. 단적인 예가 전작권전환단장의 잦은 교체다. 2007년 12월 초대 단장이 부임한 뒤 6년간 7차례나 바뀌었다. 평균 1년도 안 되는 재임기간에 복잡한 전환과정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휘했을지 궁금하다. 2012년 4월 15일 예정됐던 전작권 전환 시점이 2015년 12월 1일 한 차례 연장된 뒤 전환작업 속도도 약화됐다.
30일 서울에서 열리는 제4차 한·미통합국방협의체(KIDD)에서 한·미는 전작권 전환 작업을 재검토한다. 정부는 전작권 전환 일정을 또다시 연기하자고 요청해 국가 간의 약속을 또 한 차례 번복하는 부끄러운 일을 했지만 이번에는 동일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제대로 준비해야 한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