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넘어 함께하는 우리로 (30)] 민족운동·여성복지에 일생 바친 참 신앙인
입력 2013-07-24 17:27
YWCA 인물산책 ‘길을 따라서’- 양한나
양한나는 1893년 3월 3일 부산 동래 복천동에서 양덕유와 한영신의 1남10녀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양덕유는 교육에 관심이 많아 양한나를 서울의 진명여학교에 진학시켰으나 가세가 기울면서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으로 돌아와 일신여학교 고등학과에서 공부하게 됐다. 양한나는 일신여학교 고등과 제1회 졸업생 4명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머니 한영신은 경남여신도연합회 초대 회장을 지낸 이로 양한나의 신앙심과 신앙활동을 크게 키워 주었고 개화된 집안 분위기와 아버지의 교육열로 근대 교육을 받아 사회활동을 활발히 했다. 양한나는 1923년 현재 부산여자기독청년회(부산YWCA)의 전신인 일신여학교(부산동래) 청년회의 총무로서 여자기독교청년회 활동에 참여했다.
양한나는 1913년 3월 31일 일신여학교 1회 졸업 후 마산 의신학교의 교원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양한나의 항일의식은 의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1915년 의신학교에서 일본왕 대정의 즉위식 기념 떡을 학생들에게 먹이려 하자 분개했고 여기에 학생들이 동조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요주의 인물로 분류돼 더 이상 교단에 머무르기가 어려워 1917년경 일본의 요코하마 여자 신학교로 떠났으나 일본에서 학교 공부 외에도 사회활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밀항으로 상하이에 도착해 독립운동에 참가했다.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활약했다. 이때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났고 그가 그녀의 호적명 양귀념을 양한나(韓拏)로 개명해 주었다. ‘양한나의 나(拿)는 나(拏)의 속자로 백두산에서 한라까지 내 나라를 길이 보존하도록 노력하라’는 격려의 뜻이라고 한다. 양한나는 상하이에서 활동하면서 국내에 들어와서는 부산여자청년회 활동을 하며 1920년대부터 계속돼 온 부산 지역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한편 양한나는 미군정기에 들어서 수도청장 장택상의 권유로 1946년(1945년)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에 취임했다. 당시 민간단체들은 공창폐지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양한나 역시 경찰서장으로서 폐지운동에 주력했다. 당시 공창제하에서 실제 사창이 많았고 이는 주택가까지 번지고 있던 상황이었다. 양한나는 여자 경찰서장으로서 공창폐지를 진두지휘하면서 소외된 여성들에게 크게 관심을 가졌다. 창기 출신 여성들의 살 길을 크게 염려했고 이것이 자매여숙을 설립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됐다.
1946년 7월 1일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부산YWCA) 창립 시 총무도 없이 초대회장이 됐다. 중점사업으로 1948년부터 농예사업을 중앙회로부터 위임받아 농촌 부녀자들에게 농업, 축산, 원예 등의 기술을 교육했다. 그 후 1948년 7월 회장직을 안음전에게 물려주고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를 떠났다.
1948년 부산여자기독교청년회를 떠난 양한나는 이후 여성단체 활동에 전혀 관여하지 않고 1976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복지사업에만 전념했다. 1946년 부산 서구 아미동에서 유아 55명으로 고아원을 시작하는데 이는 양한나가 20대 후반 이후 유치원을 운영하며 유아들에게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6·25 이후 부산의 전쟁 고아들과 피난 당시 생계형 윤락여성을 돌보는 일을 하면서 자매여숙을 시작했다. 1952년 사회복지법인 자매여숙을 설립해 처음엔 전쟁 이후 오갈 데 없는 고아들과 여성들을 돌보다가 고아 가운데 정신병자가 많은 것을 알았고, 거리에서 아이를 낳는 정신병자나 전쟁의 충격으로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많은 여성 정신병자들을 접하고 1953년부터 괴정2동에 여성 정신병자들만을 받아들이는 정신병자 보호사업을 시작했다.
원생들을 입히고 먹이고 교육시키는 데 하루를 모두 보낸 양한나는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잔 적이 없었고 가재도구 없는 작은 방에서 거주하며 항상 검소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고 양한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자매여숙 2대 원장인 윤애리나 원장에 따르면 양한나는 계속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자매여숙에 대한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한다. 1976년 6월 26일에 작고, 부산진교회 기장묘역에 안장됐다.
양한나의 기본 정신은 기독교적 민족주의와 여성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양한나는 민족운동에 투철한 애국심을 갖고 참여했고 당시 기독교 계열의 여성운동 노선에서 계몽중심의운동에 주력했으며 유아교육과 일신여학교 내 기독여자청년회를 통해 사회활동을 했다.
광복 후 초기 우익 계열의 여성운동에 참여했으나 정치활동은 하지 않았고 소외된 여성들에게 혼신의 힘을 쏟았다.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을 지내는 등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독교 민족주의 계열에서 활동했다. 양한나는 1930년대 이후 일제 강점기나 광복 후에는 사회정치활동을 자제하고 복지사업에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하선규(부산YWCA 회장)
고 양한나 선생 약력
1893년 출생
1919년 3·1운동 후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활약
1928년 진명유치원 설립
1945년 초대 수도여자경찰서장 역임
1946년 부산YWCA 설립(초대회장)
1952년 사회복지법인 자매여숙 설립
1964년 장한어머니상 수상
1967년 용신봉사상 수상
1976년 6월 26일 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