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④ 청년운동의 산실 YMCA
입력 2013-07-24 17:22
청년들에게 구습껍질 깨고 변혁과 민족비전 심어주다
송강호·김혜수 주연의 2002년 영화 ‘YMCA 야구단’.
영화의 배경은 갑오개혁으로 신분제와 과거제도가 막 폐지된 조선의 한양이다. 양반이라는 이름만 걸친 호창(송강호)은 야구를 하는 신여성 정림(김혜수)과 우연히 마주친다. 호창은 정림에 대한 이성적 관심과 더불어 ‘신문물의 상징’ 야구의 매력에 푹 빠지면서 급기야 조선 최초의 야구단에 몸담게 된다.
실제로 존재했던 황성YMCA 야구단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는 한국 근대화 여정에 있어서 YMCA의 존재와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농구(1905년)와 스케이트(1908년), 배구(1916년) 등 주요 현대 스포츠 종목을 처음 들여왔고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교육과 계몽, 독립운동 및 청년·민중 운동이 시작된 곳이 바로 한국YMCA였다.
“우리는 매일 거리를 쏘다니는 수백명의 청년들을 본다. 그들은 구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와 자극만 있으면 가장 유망한 청년들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903년 4월, 헐버트 선교사가 자신이 펴내고 있던 영문 잡지 ‘코리아 리뷰’에 쓴 글의 일부다. 그로부터 6개월 뒤 한국의 첫 기독청년회 단체인 ‘황성기독교청년회(황성YMCA)’가 창립됐다. 서울 인사동에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도서실, 기도실 겸용 교실 등을 갖춘 임시 건물을 갖췄다. 황성YMCA의 초창기 모습은 당시 연동교회 담임이었던 게일 목사의 글에서 그려볼 수 있다.
“우리는 이제 YMCA를 통해 우리의 소원이던 젊은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류층의 자녀들, 상인들의 자제들, 선비나 양반의 자녀들이 모여와 한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밤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고 있다….”
황성YMCA가 역점을 둔 사업은 교육이었다. 사농공상의 편견과 그릇된 관념을 깨고 공업과 상업교육을 실시했다. 뜨개질과 도자기 굽기부터 비누 만들기, 목공, 철공 등 다양한 실업 교육을 실시했다. 1904년 시작된 주3일 야학의 수강생은 처음엔 150여명이었으나 4년 뒤에는 10배가 넘는 1800명에 이르렀다. 수시로 열리는 YMCA의 강연회와 토론회에는 당대의 명사들이 등단, 언제나 초만원을 이뤘다.
교육사업은 민중 계몽운동으로 이어졌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가며 복음전도회, 외국인 연사초청 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계몽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1925년대에 들어서면서 YMCA는 서서히 농촌으로 눈을 돌린다. 소비조합, 신용협동조합, 야학, 양돈, 양계, 농업, 행정 등의 교육을 통해 농민들의 경제적 향상, 사회적 단결을 도모한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농촌사업 조직을 마친 촌락은 188개,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수업을 이수한 이는 4856명에 달했다.
한국YMCA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도자가 있다. 월남 이상재다. YMCA를 비폭력 단체이자 민주주의 단체이며, 실천 교육의 단체로 만드는 데 헌신한 리더로 평가받는다. 조선YMCA연합회 회장 출신의 윤치호는 YMCA를 국제적 화합의 무대에 서게 만든 주인공이다.
1914년 결성된 한국YMCA 전국연맹(한국Y·이사장 안재웅 목사)은 전국 65개 지회 10만 회원, 2200여명의 활동가를 보유한 국내 최대 기독시민사회 단체로 성장했다. 내년 4월 창립 100주년을 앞둔 한국Y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모체로서 제2의 출발을 준비 중이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초창기 YMCA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에 대한 변혁의식과 민족의 비전을 심어주는 시대의 선각자 역할을 담당했다”면서 “갈등과 분열로 갈라진 지금 이 시대에 YMCA는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을 위해 또 한번 헌신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자문해주신 분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