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봉남 (9) 전시회 못 여는 가난한 화가들 위해 미술관을

입력 2013-07-23 17:09 수정 2013-07-23 20:27


작품활동을 하면서 주위 화가들에게 소원이 무엇인가 묻곤 했다. 그러면 여류 화가들은 이런저런 소원이 많았다. 헌데 놀랍게도 남자 화가들은 대부분 개인전 한번 여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전시회 열기가 쉽지 않다는 하소연이었다.

‘화가로서 독창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전시회를 갖지 못한다면 평생 무명화가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 나는 만약 내게 물질이 주어진다면 미술관을 개관해서 형편이 어려운 화가들에게 무료로 초대전을 열어 주어야겠다는 기도를 매일 드리게 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 할까. 어느 날 갑자기 후원자를 만나면서 미술관을 실제 운영하는 길이 열렸다. 사연은 이랬다. 서울 신정동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는데 이가 시려 집 근처의 치과를 찾았다. 치료하던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뭐하는 사람이십니까”라고 물었다.

“화가입니다”라고 했더니 그는 반가워하며 자신도 중학생 시절 화가가 꿈이었으나 부모의 권유로 의사가 됐다고 했다. 성함이 ‘노수영’인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바로 치과를 개업해 20년이 흘렀다고 했다.

우리는 이내 친구가 됐다. 또 거의 매일 점심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됐다.

어느 날 식사를 막 끝냈는데 노 원장이 “서 화백님, 시간 있으세요”라고 물어왔다. 있다고 하자 그는 “지금 병원을 짓고 있는데 구경 가자”고 해 같이 가게 됐다. 가보니 의원에서 300m쯤 떨어진 길가에 6층짜리 건물 내부를 꾸미고 있었다. 1층은 은행, 2층은 카페가 들어올 것이고, 3∼6층은 치과종합병원이라며 한 층 한 층을 소개했다. 노 원장은 치대 졸업 후 개업하면서 치과종합병원을 세우는 게 꿈이었다고 귀띔했다. 그리고 20년 만에 그 꿈을 이루는 것이라며 감격해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헌데 이야기 도중 내가 “제 꿈은 작은 미술관을 만들어 어려운 화가들에게 전시회를 열어주는 것”이라고 노 원장에게 말했다.

이튿날 평소처럼 점심이나 먹자는 전화가 왔다. 점심 주문을 해놓고 노 원장은 “서 화백님, 나 어제 한숨도 못 잤어요”라고 말했다.

“아니, 어디 편찮으셨어요”라고 묻자 그는 “아뇨. 미술관 때문에…”라고 근심하듯 말했다.

노 원장은 작심한 듯 “꿈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1층 은행과 2층 카페의 계약을 해지했고 내게 “1층과 2층을 미술관으로 꾸미고 관장이 되어 꿈을 펼치라”고 했다.

적잖이 놀랐다. 집세를 낼 형편도 안 된다고 사양했다. 그러나 노 원장은 “무료로 빌려드릴 테니 자유롭게 꿈을 펼치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꿈인지 생시인지…. 볼을 꼬집어 봤다. 생시였다. 마음을 가다듬고 일단 노 원장과 구두로 다짐을 받았다.

첫째, 지금까지 재벌들이 새 건물을 지을 때 사회 환원의 의미로 문화공간을 만들었으나 수입이 없으면 오래 가지 않아 문을 닫았다. 따라서 문화사업은 오랫동안 장기적으로 해야 한다. 노 원장은 “오래 하겠다”고 말했다.

둘째, 문화사업은 비영리로 해야 한다. 그것도 “좋다”고 했다. “영리사업은 위층 병원에서 하니까 괜찮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미술관 이름을 ‘예가족’이라고 짓고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이후 미술관 관장으로 11년 동안 재직했다. 이곳에서 무료로 전시회를 연 화가는 300여명에 달한다. 이런 공로로 2011년 한국미술협회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