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김정기] 코에 대한 명상
입력 2013-07-21 17:51
이탈리아 작가 카를로 콜로디가 1883년에 쓴 동화의 주인공 피노키오는 거짓말을 하면 코가 늘어난다. 이젠 세계 어린이들에게 인기 캐릭터가 된 피노키오. 하지만 세기말에 접근하는 마초 사회 이탈리아에 횡행한 거짓말을 대변한다.
그로부터 100년도 더 지난 2003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전직 대통령의 세기적인 거짓말에 대한 실질 조사가 이제야 시작되는 건 비극을 넘어 희극이다. 범죄에 따른 추징금을 내지 않기 위해 총재산이 29만원뿐이라고 대놓고 공표한 거짓말을 대한민국 사회는 수수방관해 왔다. 오랜 세월 방치하니 거짓과 정직의 경계가 아리송해졌다.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일까? 늦었지만 피노키오의 코가 이번에는 제대로 작동했으면 싶다.
피노키오처럼 코 늘어난다면
코가 길어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선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웃는 일이 많아질게다. 눈, 코, 입, 귀, 눈썹, 이마, 입술 등 인간의 얼굴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가 비대해짐으로써 얼굴의 조화미가 무너질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흘끗흘끗 보며 거리에는 실소가 가득하리라. 코에 압도된 요상한 얼굴을 염려하여 영리한 혹은 영악한 이기적 유전자는 새로운 얼굴의 진화를 위해 어떤 자구책을 강구해 갈지도 궁금하다.
늘어나는 코를 따라 고통도 늘어나리라. 길어지는 코를 어떻게 얼굴에 달고 다닐 것인가는 개인적·사회적으로 큰 문제일 것이다. 코를 받치는데 조금만 소홀하여도 부러질 듯 축 꺾이는 코로 인해 엄청난 통증과 부상에 시달리고. 다시 굴러떨어질 바위를 산 정상으로 끌어올리기를 영원히 반복하는 시지푸스 신화의 형벌처럼 너나없이 코 받들기를 중단치 못하니 지옥이 따로 없을 것이다.
늘어난 코는 의학계의 판도에도 변화를 불러올 것이다. 전공 선호도에서 저 멀리 밀려나 존폐 위기에 몰린 외과는 옛 영화를 찾을 수도 있으리라. 강남의 요소요소에 도열한 채 세금을 피해 창고에 현금더미를 보관할 정도로 성시를 누리는 성형외과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을 것이다.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견디기 어려운 수술과 치료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필요 없는 미용용 양악 수술에 이따금 회의하던 이라면 미련 없이 새로운 황금어장인 외과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뿐이랴. 현란한 수사(修辭)와 무지한 막말들이 코의 길이나 모양을 놓고 현란한 설전을 벌일 것이다. 코에 대한 갖가지 철학, 이론, 연구, 조사, 과장, 왜곡, 축소가 들끓으며 코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해석을 두고 도전과 응전 및 언론플레이가 분분할거다. 보수와 진보는 물론이고 진영논리에 의한 폭력적인 말들이 피투성이의 백병전을 벌일 것이다. 코에 가린 눈, 귀, 입도 코 지상주의, 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얼굴 전체를 생각하자고 일침을 놓으리라.
코의 길이가 거짓말에 따라 쭉쭉 늘어난다면 직업군의 선택에도 변화의 소용돌이가 칠거다. 정치인들이 집결하는 국회의사당은 한산해질 것이다. 한결같이 처음엔 절대 부정한 돈을 받지 않았다고 하다가 끝내는 감옥으로 가는 거짓말 코스를 생각하면 틀린 추정이 아닐 것이다. 공약(空約)을 공약(公約)하고, 지나친 권력과 수혜를 좀 덜어내는 일에 말만 앞세우고,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어렵게 도입한 지방자치의 의원 공천권을 틀어쥐고 안 내놓는 것은 코 길이에서 선두 그룹이라는 심증과 물증을 강화할 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코의 길이를 놓고 상한선과 하한선을 협상하고, 국민과 상대 진영을 향해 누가 더 기니, 짧으니를 따지면서 전무(全無) 아니면 전부(全部)의 혹세무민으로 정직을 가장하는 것이리라.
세상은 더 투명해질 수 있을 것
그러나 정말 신나는 건 투명해질 세상이다. 코 길이만 보면 거짓의 정도와 깊이를 가늠할 수 있으니 누가, 어디가, 어떤 곳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알 수 있다. 거짓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정직을 만나는 건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김정기 (한양대 교수·언론정보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