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대륙에 감성교육의 씨앗을 뿌리다

입력 2013-07-21 17:03 수정 2013-07-21 17:06


기아대책, 아프리카 최빈국 마다가스카르 초등학교서 미술백일장

인도양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는 아프리카 최빈국 가운데 하나. 지난 12일 오전 이 나라 수도 안타나나리보의 변두리에 자리한 암보히바오초등학교에서 ‘CDP(Child Development Program) 데이(Day)’가 열리고 있었다. 1년에 한 번 갖는 행사지만 올해는 여느 때와 달리 교실 바깥 벽면에 그림이 가득 걸려 있었다. 생전 처음 갖는 미술백일장이었다.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회장 정정섭)이 마련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이곳을 방문한 중견화가 황주리(55) 최석운(52)씨는 아이들의 그림을 골똘히 살피며 200여점 가운데 6점을 장려상으로, 4점을 우수상으로 뽑았다. 시상식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황씨는 “그림이 전반적으로 밝고 활기차다”고 칭찬한 뒤 “가장 좋은 작품은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미술은 창의력과 상상력을 일깨우는 동시에 여러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용한 도구”라고 강조했다. 이 학교에서 CDP를 운영 중인 이정무 박지은 선교사는 “미술교육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데도 자신의 세계를 주저 없이 드러내는 게 놀랍다”고 기쁨을 나타냈다.

이날 행사를 끝으로 ‘예술을 통한 자기변화’를 모토로 내건 기아대책의 미술교육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이달 5일부터 탄자니아의 잔지바르, 케냐의 코어, 마다가스카르의 안타나나리보 지역 등 아프리카 오지를 돌면서 진행된 행사는 도화지와 크레용도 만져보지 못한 어린이에게 그림이 가진 자기발견과 치유의 힘을 심어준 뜻 깊은 기획이었다. 두 작가는 내년 가을에 이번 여정을 담은 전시회를 가질 계획이다.

“아이들은 다 화가예요. 무엇보다 이곳 어린이들에게는 동심이 살아 있어요. 문명국처럼 규격화되지 않은 ‘야성의 인자’가 남아 있어요. 바스키야의 유전자를 새삼 확인했다고나 할까요? 앞으로 이들의 감성을 좀 더 창의적으로 계발한다면 교육적으로 큰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황주리)

“그림은 내 가슴 속의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일입니다. 잘났든, 못났든 자신의 진솔한 모습을 바라보게 하는 거울이기도 하지요. 묘사력은 그 다음 차원이고요.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방식은 해외 오지의 선교사역에도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최석운)

검은 대륙에 예술교육의 효과를 실험하기 위해 처음 도입한 이 프로그램은 현지 선교사들 사이에 큰 화제를 모았다. 도화지와 크레용을 쥐어주며 막연히 그림을 그려보라고 주문하던 자신들의 교육방식에 일대 충격을 던져준 것. 더욱이 “똑같이 예쁜 그림을 요구하는 것은 죽은 교육”이라는 작가들의 교육방식에 환호를 보냈다.

지난 7일 잔지바르의 숲 속 교회에서 이뤄진 미술교육에서 아이들은 놀라운 경험을 했다. 두 작가의 지원으로 생전 처음 미술도구를 만져본 이들은 “옆 친구의 얼굴을 그려보라”는 요청을 받고는 한동안 긴장하다가 최씨가 “그림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 “좋은 그림은 나만의 표현을 하는 것”이라며 열변을 토하자 하나둘 자신의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5명당 1통의 크레용이 주어졌다. 뛰어난 집중력으로 그림을 완성해 우수상을 받은 하산(13)은 서툰 영어로 “I can do anything!”이라며 눈물을 글썽였으며, 까까머리 사디키(12)는 친구의 얼굴을 멋지게 그려 칭찬을 받았다. 행사를 지켜본 박현석 오영금 선교사는 “아이들이 이렇게 진지한 자세를 보인 건 처음”이라며 놀라움을 표시했다.

케냐의 코어에서도 미술교육은 즉각 반응을 나타냈다. 최인호 목사와 한지선 선교사 부부가 사역하는 이곳은 아이들이 극단의 가난 속에서 고통 받는 현장. 지난 10일 최씨가 교실 칠판에 닭을 그려 보이며 “자신의 주변을 묘사해 보라”고 과제를 던지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선과 색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아이들은 날짐승에 대한 이 지역 특유의 터부까지 무너뜨리며 표현의 마술을 펼쳐 보였다. 바다와 집의 지붕을 환상적으로 그린 르우벤(11) 등 4명이 상을 받았다. 한 선교사는 “그동안 소말리아 상인들에게 당하지 말라는 수준의 교육을 시켜왔지만 미술교육은 꿈도 꿔보지 못했다”며 “이번 교육을 바탕 삼아 감성교육을 계속하면 아이들의 인격과 자아형성에 큰 진전이 있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행사를 마무리한 뒤 가진 좌담에서 황씨는 “미술은 투자하는 시간이나 장비에 비해 내면의 성장을 촉진하는 효과가 크다”며 아이들에게 언어나 수리 이전에 일주일에 한 번,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규칙적인 미술교육을 권장했다.

최씨 역시 “아프리카에는 학용품이나 식료품보다 더 중요한 게 감성교육”이라고 전제한 뒤 “미술전문가가 교육을 맡으면 좋겠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선교사 파송 이전에 체계적인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좋겠다”며 프로그램 마련에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겠다고 덧붙였다.

예술은 자기를 돌아보며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이 있다. 어린이에게 심어진 꿈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정표로 작용한다. 드로잉이라는 물리적인 행위는 때로 정신을 일깨워 영혼을 어루만지기도,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도 한다.

특히 아프리카에는 예술의 힘이 필요하다. 붓을 잡은 손이 가슴을 칠 때 닫혔던 눈이 열리고, 남을 향해 구걸하는 손이 부끄럽게 여겨지는 순간 아프리카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다. 이제 씨앗은 뿌려졌고 열매를 거두는 일이 남았다. 행사를 진행한 기아대책의 서주형 간사는 “예술교육을 통한 아이들의 변화는 한국 기독교의 아프리카 선교 방향과도 일치하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잔지바르(탄자니아) 코어(케냐) 안타나나리보(마다가스카르)=글·사진 손수호 객원논설위원(인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