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경원] 여의도 생활자의 수기
입력 2013-07-19 18:13 수정 2013-07-19 23:09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의 아침은 노점상이 깨운다. 새벽 6시면 벌써 김밥과 주먹밥, 샌드위치를 파는 사람들이 여의도 거리에 가득하다. 여의나루로를 따라 여의도역 5번 출구에서 여의도우체국까지 5곳, 의사당대로 곁으로는 교보증권에서 한화투자증권까지 4곳 정도가 콘크리트 바닥에 자리를 편다. 대로변이 아닌 골목에도 많다. 한국거래소와 한국노총 건물 사이, 유화증권 건물 앞에 나오는 노점상은 10년을 넘었다.
출근이 일러 속이 주린 증권가 직원들은 “길에서 밥 짓는 냄새가 풍긴다”고 한다. 허름한 보온 박스와 번듯한 트럭 좌판에서 나오는 김밥 생김새가 서로 다르지 않다. 김밥을 건네받으며 눈으로는 스마트폰의 숫자를 좇는 야무진 이들이, 위생과 신용카드 불가 문제를 시비하는 일은 없다.
오전이 지나면 여의도 거리의 주인공은 아주머니들로 바뀐다. 식당 줄서기 전쟁을 피해 오전 11시30분쯤부터 슬금슬금 시작되는 점심시간에, 이들은 전단지를 들고 아침식사 노점상이 있던 자리에 선다. 거래소 후문에서 한국예탁결제원까지 50m도 걷지 않았는데 손에는 어느새 전단지 5장이 들려 있다. 체지방이 줄면 등록비를 환급한다는 헬스클럽 전단지와 마블링이 선명한 고깃집 전단지가 함께 쥐어진다. 그냥 가슴 큰 여자 사진만 있는 정체불명의 전단지도 있다.
전단지 부대는 웬만하면 서로 아는 사이다. 일감은 ‘인터넷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나눠준다. 한 아주머니는 “2시간을 나눠주고 2만원을 받는다”고 했고, 다른 아주머니는 “1장을 주면 50원이 계산된다”고 말했다. 전단을 나눠주며 상호명을 분명히 외쳐야 하는 까닭에 이들은 대개 목이 쉬어 있다. “예전에는 잘 받아 줬는데, 요샌 증권가 사람들이 앞만 보고 걸어요.” 겨우 말하는 아주머니는 “비가 오면 실적이 나올 리 없기 때문에 장마철이 야속하다”고도 했다.
같은 시각 여의도 거리에서는 배달 오토바이들도 많이 눈에 띈다. 중화요리, 도시락, 햄버거, 과일, 각종 음료가 높이 솟은 건물들 틈으로 쉬지 않고 움직인다. 한 도시락업체 직원은 “배달 주문이 유난히 많은 날에는 ‘주식시장에 무슨 일이 났구나’ 생각한다”고 했다. 중국집 주방장은 프라이팬 앞에서, 배달의 기수들은 오토바이 위에서 코스피의 변동성을 안다.
점심시간이 지나 한산해진 거리에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금융감독원과 거래소 앞에서 집회를 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세력’의 주가조작 의혹을 부르짖거나 금융당국의 무관심을 규탄한다. 예전에는 외환은행 노동조합이 하나금융지주와 합병할 수 없다며 여의도에 자주 왔었다. 최근에는 파업 중인 골든브릿지투자증권 노조가 이 자리의 단골이다. 지나가는 증권맨들은 “저렇게 집회를 하면서도 고객관리는 각자 기가 막히게 하더라”고 수군거린다.
부실 저축은행에 예금을 맡겼던 이들도 때가 되면 구호를 외치고 돌아간다. 나이 지긋한 분들이 많고, 멀리 부산에서 온 이들도 있다. 금융위원회와 금감원이 분리된 지 오래고 금융위는 광화문으로 이사를 갔는데도, 아직도 “금융감독위원회는 각성하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금융당국의 체계와 역할이 시시때때로 변해 가지만, 이들에게는 예나 지금이나 빼앗긴 돈을 하소연할 곳일 뿐이다.
오후부터 해질녘까지는 회사들의 투자설명회, 사업설명회가 열린다. 63시티나 콘래드호텔은 거액 자산가들을 모시기에 적당한 장소다. 호텔 에서 명함이 오가고 와인 잔이 부딪히는 날, 입구 주차공간에는 유독 검은 차들이 많이 보인다. ‘슈퍼리치’의 운전기사들은 입구에 모여 담배를 피웠다. 호텔 안에서 들려오는 ‘전략’이나 ‘위기’에서 자유로워 보였다. .
여의도역에서 ‘빅이슈’를 파는 아저씨마저 돌아가고 포장마차들이 하나둘 천막을 펼치면, 이제 술판이 벌어질 시간이다. 하루를 마치고 술잔을 든 이들은 말이 많다. “그 투자자문사에서 엊그제 ‘되도록 창가에서 떨어져 근무하라’는 지침이 내려왔대요. 장이 안 좋으니까 다들 충동을 느끼나봐.” “3억원을 예치한 VIP고객을 배웅하다 지갑이 쏟아져서 우연히 봤는데, 옆 증권사 통장에는 30억원이 찍혀 있더라고요. 왜 패배감이 드는지 원.”
세계 경기둔화를 탓하던 소리가 배우자에 대한 불만, 구조조정의 한숨으로 옮겨갈 때면 여의도는 이미 한밤중이다. 이제는 거리의 주인공이 다시 바뀐다. 비틀대는 이들을 그악스레 노래방으로 이끄는 호객꾼들이다.
“요즘은 2차들을 잘 안 가….” 입간판에 기대 한숨쉬는 이를 보니 낮에 헬스클럽 전단지를 나눠주던 그 아주머니다. 밤에는 1시간에 기본 5만원을 받고, 테이블별 수당이 따로 주어진다고 한다. 낮에 듣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는데 밤의 목소리는 은근하다. 그는 여의도의 호황과 호기롭던 증권맨들을 기억한다고 했다. “여자들끼리 와서도 멋있게 폭탄주를 돌리곤 했지. 우리 같은 사람도 좋았어요.”
이경원 경제부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