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손영옥] 열화당의 ‘지진성’에 대하여

입력 2013-07-19 18:13 수정 2013-07-19 23:13


속도는 근대적 경험이다. 속도를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감각하게 한 사물은 기차였다.

영국인 G 스티븐슨이 발명한 증기기관차가 1814년 처음으로 레일 위를 달리기 시작한 이래 기차는 19세기 근대인에게 경이 그 자체로 다가갔다. 도시 부르주아의 쾌락과 생활방식을 묘사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장소와 장소를 쾌속으로 이어주는 기차를 놀라움으로 바라보며 화폭에 담았다. 클로드 모네의 ‘파리 생라자르 역’이 대표적이다. 영국의 풍경화가 윌리엄 터너는 대기에조차 그런 속도감을 표현했다. 20세기 초, 자동차 등 기계문명이 가져올 미래를 낙관했던 이탈리아 미래주의 화파는 속도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찬양했다. 얼마나 속도에 열광했는지 미래주의를 이끈 작가 필리포 마리네티는 “달리는 자동차는 여신상보다 아름답다”고까지 말했다.

세계 1, 2차 대전을 거치며 근대 과학과 이성에 대한 회의가 잠시 지배하기도 했지만 속도에 대한 숭배는 현대에 들어서도 건재하다. 아니, 갈수록 맹위를 떨친다.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면서 초 단위로 외환거래가 이뤄지고 거기서 천문학적 이익이 생기기도 하니 속도 지상주의는 곧 물신 숭배이기도 하다. 상업주의화, 이것은 바로 현대의 지고지순한 가치가 아닌가. 문학조차 ‘시장 문학’이 됐다고 자조하는 마당이니 출판 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 책보다는 독자가 솔깃해 선뜻 지갑을 꺼내게 만드는, 팔릴 수 있는 책에 출판계는 온 감각을 집중한다.

도서출판 열화당이 지난달 10년의 각고 끝에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 전집’(10권)을 완간했다. 베스트셀러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책이다. 이는 속도 지상주의 시대를 역주행하는 행보로 비친다. 얼마 전 열화당 이기웅(73) 대표를 만났다. 그는 “우리 사회에 지진성이 필요하다”며 자신의 출판 철학을 얘기했다. 지진성이라니? 이 대표가 만든 조어인 듯했다. 그는 그 의미를 ‘더듬거리는 시간’으로 풀이했다. 흔히 학업이나 지능발달이 더딘, 좀 모자라는 아이를 일컫는 ‘지진아’에서 따온 것 같다. 시쳇말로 ‘어리바리’한 것으로 폄하될 수 있는 행동이나 사고방식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어서 의외성이 주는 신선함은 컸다.

지진성은 속도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느림의 미학과는 다른 듯했다. 천천히 가면서 삶의 피로를 치유하는 내려놓기식 힐링과는 다른 차원으로 보였다. 모두가 한 방향으로 고속 질주하는 시대에 ‘이게 아닌데…’하고 성찰적 질문을 던지는 것, 혹은 좀 모자란 것으로 비칠 정도로 계산 없이 우직하게 나아가는 삶이다.

고유섭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미술을 체계적으로 조사·연구하고 집필활동을 하면서 미답의 학문을 개척한 한국인 최초의 미학자요 미술사학자다. 그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는 일은 돈 되는 일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10년이 걸릴 정도로 지난한 작업이었다. 이 대표는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적지 않았다”고 했다.

그나마 고유섭의 제자인 미술사학자 황수영(1918∼2011) 선생이 보관한 원고를 토대로 1993년 통문관에서 펴낸 ‘우현 전집’(4권)이 큰 힘이 됐다. 스승을 흠모해 ‘우리 선생’도 아닌 ‘내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황 선생은 6·25전쟁 피란 때도 스승의 원고를 싸들고 다녔다. 이번 전집에는 통문관 전집과 거기 실리지 못한 미발표 원고, 흩어진 논문 등을 고서점가를 뒤지면서까지 모은 땀의 결정체들이 담겼다.

속도의 다른 이름인 베스트셀러 만들기가 최고 가치인 시대에 좋은 책, 필요한 책에 정성을 쏟는 열화당의 지진성에 박수를 보낸다.

손영옥 편집국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