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점자도서관 육근해 관장
눈먼 아버지는 일곱 살 난 딸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에 나갔다. 그의 어린 딸은 도로변에서 버스나 택시를 잡기 위해 분주히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이들 앞에 서는 버스나 택시는 거의 없었다. 어린 소녀의 손에 의지한 눈먼 중년 남성을 본 버스와 택시 기사들은 이들을 못 본 척하며 지나쳤다. 운 좋게 택시를 타도 사람들의 냉대는 여전했다. 기사에게 ‘장님이 타 재수 없다’는 말을 여러 번 듣고서야 이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곳에서의 대접은 이전과 사뭇 달랐다. 산간벽촌의 시각장애인 가정집에 들어서자 온 가족이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를 맞았다. 집주인은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융숭한 대접을 했다. 집 안 책장에는 아버지와 어린 딸이 밤늦도록 만든 점자책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어린 딸은 그제야 왜 이들이 아버지를 환대했는지를 깨달았다.
육근해(52·여) 한국점자도서관장은 시각장애인 아버지를 일곱 살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다녔다. 육 관장의 아버지는 1969년 사재를 털어 한국점자도서관을 세운 고(故) 육병일 관장이다. ‘시각장애인 자립의 근간은 책’이라 확신한 육병일 관장은 시각장애인의 정보접근성을 개선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았다. 아버지는 전 재산을 털어 도서관 운영비를 충당했고 아내와 자녀들에게 도서관 일을 최우선으로 돕도록 권했다.
지난 15일 서울 암사2동 한국점자도서관에서 만난 육 관장은 그런 아버지를 원망치 않는다 말했다. 가족보다 시각장애인을 더 챙긴 아버지 탓에 어린 시절 끼니와 잠잘 곳을 걱정하는 날들이 많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의 사명을 깨달을 수 있었다고 했다.
“새벽까지 점자책을 만들며 시각장애인을 돕는 일을 했지만 정작 우리 가족은 무허가 집에 전기도 없이 살았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반항하진 않았어요. 아마 어릴 때 아버지와 다니며 만난 시각장애인들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 거 같아요. ‘이 일은 참 귀하구나. 하나님께서 날 시각장애인 아버지 딸로 태어나 늘 모시고 다니게 한 데는 다 이유가 있구나.’ 이 사명감 덕에 2대가 한국점자도서관 44년 역사를 지켜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 자식들은 눈이 보이니 괜찮다
그의 아버지는 전주 땅 부잣집 막내아들이었다. 유복한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라던 아버지는 눈에 홍역 균이 들어가 10세 때 시력을 잃었다. 순식간에 시각장애인이 된 아버지는 비탄에 빠졌다. 아들의 불행을 안타까워한 육 관장의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제생원 맹아부(현 서울맹학교 전신)에 보냈다. 졸업 후엔 개인교사를 붙여 침술을 가르친 다음 서울 세종로에 침술원을 내줬으며 신촌 로터리에 2층집도 마련해줬다.
침술원이 용하다는 말이 돌자 환자들이 물밀 듯 몰려왔다. ‘중풍 온 사람도 이곳에서 침 3번 맞으면 걸어 나간다’는 소문 때문에 환자들은 길게 줄을 서 육 관장의 아버지를 기다렸다. 그때마다 육 관장을 비롯한 5남매는 환자에게 길 건너편 병원을 소개했다. 아버지가 시각장애가 있는 지인을 만나러 가 병실을 자주 비웠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다른 시각장애인과 달리 사교성이 뛰어났어요. 인근에 시각장애인이 산다는 이야기만 들어도 무조건 전화하고 찾아가 안부를 묻곤 했지요. 당시 장애인의 사회활동은 전무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아버지는 그렇게 알게 된 인맥으로 ‘동심회’란 조직도 만들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모여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었죠.”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인의 삶에 관심이 많았던 아버지는 어느 날 비장애인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큰 충격에 빠진다. 점자주간신문인 ‘맹인복지’를 발행하기 위해 뜻있는 이들과 창간준비를 하던 아버지는 점차 대화가 단절되는 걸 느꼈다. 비장애인 친구들은 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은 어휘를 사용했고 다양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이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던 아버지는 일본에 점자도서관이 있다는 데 착안해 69년 서울 종로5가에 한국점자도서관을 세웠다.
평탄했던 육 관장의 가정에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 건 이때부터다. 아버지는 직원 5명을 고용해 각종 책을 점역했다. 장서 확보를 위해 침술원과 신촌 자택을 정리하고 가진 재산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손에 잡힐 만한 결과는 거의 없었다. 가산은 5년 만에 바닥났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소공동, 북창동, 사당동, 성내동으로 옮겨 다니며 점자도서관을 운영했다. 당시 집이 없어 도서관 창고에서 지내던 가족들은 새벽까지 점자책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등록금이 없어 5남매 모두 대학을 갈 수 없었다. 대신 오빠들은 도서관 일을 도왔고 언니들은 직장에서 일했다. 언니들 월급은 가족 생계유지에 쓰였다.
“어머니는 항상 자녀들을 보며 가슴아파했죠. 친척들마저 ‘쓸데없는 데 돈을 쓴다’고 했으니까요. 어머니가 어느 날 아버지께 ‘남들은 어떻게든 자식 공부시키려 애쓰는데, 우리는 공부는커녕 (일하느라) 제대로 키우지도 못했다’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대요. ‘우리 자식들은 눈이 보이니 어떻게든 살 수 있잖소.’ 아버지의 이러한 열정을 알기에 가족 모두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이게 내 길이로구나
약대 진학을 꿈꾸던 육 관장은 돈 때문에 대학에 갈 수 없는 현실에 좌절했다. 친구들처럼 공부를 못하고 건설회사 비서실에서 일하는 처지가 답답했던 육 관장은 교회를 찾았다. 그는 한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도 제 친구들처럼 공부하고 싶어요.’
81년 교회에 첫발을 내딛은 그는 꾸준히 예배를 드렸다. 그러다 놀랍게도 비슷한 시기에 부모님께서 교회에 나간다는 걸 알게 됐다. 그는 이때부터 부모님과 시각장애인 목사가 개척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막연히 공부에 대한 꿈을 키워나갔다.
직장생활을 한 지 약 1년이 지났을 무렵 그가 다니던 회사에 부도가 났다. 육 관장은 이때를 기회삼아 취업자리를 알아보는 동시에 독학으로 대입공부를 시작했다. 그해 서울 강남의 작은 무역회사에 입사한 그는 83년 회사 인근의 단국대 계산통계학과에 지원해 합격했다. 당시 컴퓨터 관련 전공이 유망했기에 선택한 전공이었다.
87년 졸업 때까지 고학하며 공부한 그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만난 남편과 그해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직장생활을 하던 육 관장은 92년 점자도서관 일을 도와 달리는 아버지의 부탁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모시고 여러 곳을 다닌 그는 이에 부담감 없이 수락했다.
그가 도서관 일을 시작하자 아버지는 육 관장을 국내외로 데리고 다니며 누굴 만나고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 가르쳤다. 점자도서관 일에 보람과 흥미를 느낀 육 관장은 점차 시각장애인을 돕는 일이 자신의 사명임을 깨닫게 됐다. 이런 생각은 9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더 확고해졌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요. 하나님께서 공부할 수 있게끔 길을 여시고 아버지와 국내외를 다니며 점자도서관 일을 익혔어요. 도서관도 신축 건물로 이전해 30여년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게 됐고요. 그때 생각했죠. ‘아, 이게 내 길이구나. 이 사명을 위해 이렇게 아버지와 동행케 하셨구나.’”
점자도서관 운영에 사명감을 갖게 된 육 관장은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관리를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점자도서관에 복지적 접근이 필요하다 판단한 그는 99년 단국대 사회복지대학원에 입학했고 2001년 8월 석사학위를 받았다. 체계적 장서 관리를 위해 문헌정보학도 공부했다. 육 관장은 2004년 성균관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으로 석사학위를, 2008년엔 경기대 일반대학원에서 문헌정보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아버지처럼 육 관장도 점자도서관 운영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디지털·인터넷 시대를 열기 위해 2000년부터 사업계획안을 정부기관에 제출했다. 문제는 2001년부터 시작됐다. 당시 전국에 20개가 넘는 점자도서관이 생기면서 정부 예산이 분산된 것이다. 예산과 후원이 반으로 줄면서 점자도서관 운영에 점차 차질이 생겼다.
“1년 뒤인 2002년엔 폐관 위기까지 갔어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습니다. 주택담보로 도서관 운영자금을 대출받았다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어요. 제 수중에 있는 돈 모두를 도서관에 쏟아 부었기 때문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아무런 대안을 찾을 수 없었던 육 관장은 2003년부터 집 앞 교회 새벽예배에 나갔다. 매일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점자도서관 운영도 문제였지만 전무하다시피 했던 한국의 장애인 정책을 위해서였다.
“1년간 새벽예배를 드렸지만 바로 상황이 좋아진 건 아니었습니다. 2004년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후원의 손길로 손해액이 점차 메워지더니 2006년엔 저희가 생각지 못한 여러 프로젝트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자점자도서인 ‘e점자북’ 개발도, 사회적 기업으로 점자책을 출판하는 도서출판 점자도 이때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께서 고난 중 제 기도를 들으셨다는 데 힘이 나더군요.”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현재 한국점자도서관에는 8만여 권의 장서가 있다. 점자책뿐 아니라 전자점자도서, 디지털 녹음 도서, 점자라벨도서, 큰 글자 도서, 수화 도서, 다국어 도서 등 장서 형태도 다양하다. 육 관장이 다양한 형태의 장서를 구비한 이유는 시각장애인 이외에도 독서에 어려움을 겪는 ‘독서장애인’을 위해서다.
“시각 이외 다른 장애를 가진 분들도 어휘력이나 문장 이해도가 상당히 떨어지더라고요. 비장애인에 비해 정보를 접하는 빈도가 현저히 차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다문화 가정 자녀나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죠.”
독서에 있어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의 차이를 없애자는 그의 소신에서 개발된 책들은 시각장애인 어린이의 태도를 바꿨다. 손이 아파 점자를 읽기 싫어하던 이들이 촉각도서를 읽고 책 읽기에 흥미를 붙였다. 또 점자라벨도서와 UV잉크로 점자를 표기한 묵점자 혼용도서를 비장애인 가족이나 친구와 읽고 자존감이 높아졌다는 이들도 생겼다. 한빛·서울 맹학교 등 장애인 기관에 매주 2회 방문하는 이동도서관인 ‘북버스’를 기다리며 그에게 감사해하는 학부모를 볼 때마다 육 관장은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그간 시각장애인에게 문학, 자연, 독서 체험캠프를 열어온 그는 최근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는 데서 차별이 없어진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다. 이 때문에 육 관장은 한국점자도서관 이용방법도 바꿨다. 시각장애인 집에 주문한 책을 택배로 보내던 것을 거주지역 공공도서관에 보내 직접 도서관에서 수령케 하는 식이다. 그는 이것이 지역사회와 시각장애인이 교류하는 접촉점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새로운 방식으로 책을 대출하면 점자도서관 이용자 수가 줄 수밖에 없어요. 지역 도서관 대출은 아무리 이용 인원이 많아도 1건으로 집계되거든요. 이용률이 줄면 정부에선 예산을 줄이기 때문에 우리 쪽에선 불이익이죠. 하지만 전 지역 도서관과 협약을 맺어 이 방식을 앞으로 더 확장할 거예요. 시각장애인이 지역사회와 더불어 사는 게 더 중요하니까요. 빌 게이츠가 ‘우리 동네 도서관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듯 우리나라에도 훗날 ‘점자책 한 권이 내 인생을 바꿨다’는 장애인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전 이 사명을 완수할 때까지 계속 뛸 겁니다. 우리 아버지처럼요.”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
[이 땅의 희망지기-육근해] 세상을 손끝으로 느낀답니다 참으로 은혜롭지요
입력 2013-07-19 17:52 수정 2013-07-19 18: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