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기억에 균열이 나타나는 순간에 주목

입력 2013-07-18 17:30


전후(戰後)라는 이데올로기/고영란(현실문화·2만원)

현대 일본의 역사에서 ‘전후(戰後)’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일본제국의 해체와 연합국 최고사령부의 점령을 아우르는 시간대를 가리킨다. 하지만 표제의 ‘전후’는 단순한 시간적 지표가 아니라 일본의 근·현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혹은 집단 기억의 프레임으로 제시된다.

일본은 패전 이후 가해자의 기억을 지워내고 피해자로 스스로를 각인시킨다.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만들어진 ‘전후’라는 이데올로기는 일본의 식민지 확장 시대인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기억에 대한 저항의 교착’ 상태를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B·C급 전범을 다룬 일본 드라마 ‘나는 조개가 되고 싶다’의 경우 1958년 작에서는 “죄가 무거운 A급 전범에 상대적으로 B·C급 전범의 죄가 무겁지 않다”는 점을 환기시켰으나 2008년 작에서는 “기록영상 장면은 삭제되고 연합군에 의한 재판의 부당함만 눈에 띄도록 연출됐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니혼대학 국문학과 교수인 저자는 오히려 “내가 주목하는 건 ‘전후’라는 말의 공백”이라며 “‘전후’라는 말의 공백이 메워지는 순간, 역사적 기억에 슬며시 균열이 나타나는 순간에 주목한다”고 밝히고 있다. 김미정 옮김.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