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남호철] 가상과 현실 사이
입력 2013-07-18 17:36
“비극적 결말을 부르는 현피는 온·오프라인의 정체성 구분이 떨어지기 때문”
온라인에서 다툼을 벌이던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서 승부를 겨루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로 ‘현피’가 있다. 현실(現實)과 PK(Player Killing)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조어다. PK는 ‘리니지’나 ‘워크래프트’ 같은 다중접속 온라인 롤플레잉게임에서 다른 게이머의 캐릭터를 죽이는 것을 말한다. 가상공간에서의 싸움인 셈이다.
게이머에게 분신이나 다름없는 캐릭터가 다른 플레이어의 공격을 받아 죽는 것은 자신이 변을 당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 모아놓은 각종 아이템과 장비를 잃게 돼 타격도 만만찮을 게다.
온라인에서의 다툼 때문에 실제로 만나서 싸우는 일이 빈번해졌다. 게임이나 커뮤니티 등에서의 분쟁이 극심해져 서로 감정이 상하게 되면 가상공간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현실로까지 폭력적 마찰이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최근에는 정치적 이념 대립을 이유로 현피를 벌이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17일 부산에서 발생한 사건은 충격적이었다. 정치·사회 문제와 관련해 인터넷상에서 보수·진보 논쟁을 벌이던 30대 누리꾼이 동갑내기 누리꾼을 처참하게 살해함으로써 현피의 비극적인 결말을 단적으로 보여줬기 때문이다. 백모씨와 김모씨는 한 인터넷 사이트의 정치·사회 코너에 활발하게 글을 올리던 사람들로 3년 전부터 진보적인 성향의 글을 함께 올리며 가깝게 지내왔다.
하지만 1년 전부터 김씨가 보수 성향의 글을 올리는 등 견해를 달리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이 비극의 단초가 됐다. 감정이 상한 백씨와 김씨는 서로 사생활을 언급하거나 심한 욕설을 주고받는 등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가상공간에서 익명성을 무기로 상대방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과도하게 비난하며 벌이던 자존심 싸움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태로 비화했다.
우리 생활에서 온라인 영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면서 현피로 촉발된 범죄는 크게 늘며 극단화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4월 10대들이 스마트폰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서 대화를 하다 갈등을 빚은 대학생을 불러내 살해한 ‘신촌 대학생 살인사건’이 일례다. 범행에 가담한 10대 2명에게 지난 5월 법정 최고형인 징역 20년이 확정됐다.
2010년 9월 대구에서는 인터넷 방송의 게임 진행자가 욕을 했다는 이유로 한 게임 동호회 회원이 무더기로 찾아가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지난해 3월 경찰에 적발된 인터넷 커뮤니티 ‘맞짱카페’는 10대 청소년들이 싸움의 기술을 공유하고 직접 만나 싸움을 주선하기도 했다.
외국도 예외는 아니다. 중국에서는 지난해 1월 게임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상의 다툼으로 10대 청소년 12명이 칼부림 난투극을 벌여 2명이 부상했다. 러시아에서는 2007년 게임 캐릭터를 죽인 것이 발단이 돼 게임 동호회 회원들이 다른 동호회 회원 1명을 집단 구타해 숨지게 했다.
현피는 주로 디지털 문화에 익숙해 감정 표현이 즉각적인 젊은층에서 많이 나타난다. 익명성에 기댄 채 남을 비방하고 몰아가는 성향이 강해지다 보니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정체성 구분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지난해 한국인터넷진흥원이 발표한 ‘인터넷 윤리문화 실태조사’에 따르면 사이버 폭력 가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 38.5%, 30대 40.3%, 20대 58.2%, 10대 76%였다. 인터넷 사용이 늘고 있는 청소년들에 대한 사이버 윤리의식을 강화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조사결과다.
최근 정치권 인사들이 ‘언어 살인’에 가까운 막말과 입에 담기 민망한 욕설을 쏟아냈다. 당장의 분노 때문에 또는 지지층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했을 수도 있다. 민주당 홍익표 전 원내대변인의 ‘귀태(鬼胎)’, 이해찬 상임고문의 ‘당신’,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의 ‘다카키 마사오’ 발언이 대표적이다. 아무렇게나 함부로 내뱉다가 서로 감정이 격화돼 ‘현피 뜨자’는 일이 초래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남호철 논설위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