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봉남 (6) 형편 어려워 ‘畵家의 꿈’ 접은 이들 위해 미술강좌를

입력 2013-07-18 17:15 수정 2013-07-18 22:00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릴 때마다 그림 그리는 것이 곧 ‘내 마음의 일기’라는 생각을 갖곤 했다. 그림을 그리며 마음을 수련하고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깨닫게 되길 바랐던 것이다.



나도 30대 초반에 비교적 늦게 그림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런지 어린 시절 화가의 꿈을 가졌으나 환경이 여의치 못해 미술을 전공하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생각을 갖게 됐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 살아간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달란트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이 그 재능을 발견하지 못한다. 또는 알고 있어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주어진 재능을 발휘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화가의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위해 무언가 할 일이 없을까 하는 생각까지 도달하게 됐다.



우선 그림이라는 달란트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다. 여기에다 이웃의 행복에 보탬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생을 사는 의미이고 보람이라고 생각하니 나 외의 다른 사람들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힘이 미약했다.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학원조차 없었다. 며칠 생각하고 연구한 끝에 ‘미술 강좌’를 생각해 냈다.



1980년대 초 기독교방송국 안에는 영어강좌를 하는 문화센터가 있었다. 그곳 원장에게 이 같은 계획을 말하니 흔쾌히 동의해주었다. 곧바로 교실 2개를 마련했고 ‘미술 문화 센터’ 강좌를 개설했다. 성인을 대상으로 20명씩 모집 광고를 신문에 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놀랍게도 200명 이상의 수강생이 몰려들었다. 화가의 꿈을 여러 가지 형편으로 인해 접었던 사람들, 미대를 가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 꿈을 잊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2년 과정으로 서양화반(소묘, 수채화, 유화)과 동양화반(사군자, 수묵화, 채색화)을 운영하며 강사를 초청했다. 나도 서양화반 대표 지도 교수로 유화를 가르쳤다.



서양화반은 소묘과정에서 6개월 동안 석고와 정물을 주로 그리고 수채화 과정에서 정물과 꽃 등을 6개월 동안 배웠다. 1년 동안은 유화를 집중적으로 그렸다. 동양화반은 사군자과정에서 1년을 수업한 뒤 수묵화와 채색화 과정으로 나눠 1년을 교육받은 뒤 수료할 수 있었다.

수강생은 30대에서 60대까지 연령층이 다양했는데 미술 강좌가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 주었다고 고백하곤 했다. 어린아이처럼 감격하며 고마워하는 이들과 만남을 통해 더욱 열심히 가르쳐야 할 사명을 느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새벽 일찍 집을 나선 학생도 있었고 하루 전에 서울로 올라와 여관에서 자고 다음 날 수업을 마친 뒤 내려가는 학생도 있었다. 성인 대상 미술문화센터는 대성공이었다. 큰 보람을 느끼면서 그림을 더욱 열심히 가르쳤다.



언론사에도 문화센터가 생겨났다.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도 이런 강좌가 생겼고, 구청이나 동사무소 등에서도 크고 작은 강좌를 진행했다. 그러다보니 미술애호가에서 더 나아가 직접 그림을 그리며 창작까지 하는 인구가 크게 늘어나 사회 이슈가 될 정도였다.



그동안 그림을 가르친 학생이 2000여명에 달한다. 그중 100여명의 학생들은 늦게나마 전업 화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림 선생으로서 정말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