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데까지 간 인터넷 보혁논쟁… 끔찍한 살인 불렀다
입력 2013-07-18 05:37
인터넷상에서 정치·사회 문제와 관련해 보수·진보 논쟁을 벌이던 영·호남의 30대 동갑내기 남녀 누리꾼들이 결국 현실에서 살인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인터넷상의 이념논쟁이 살인사건으로 비화한 것은 처음이어서 충격과 함께 도 넘은 이념논쟁에 경종을 울렸다.
부산 해운대경찰서는 17일 백모(30·광주시 북구·무직)씨에 대해 살인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밝혔다.
백씨는 지난 10일 오후 9시10분쯤 부산 해운대구 한 아파트 김모(30·여)씨의 집 계단에서 외출하는 김씨의 배 등을 흉기로 9군데나 찔러 살해했다.
백씨와 김씨는 인터넷 디시인사이드 사이트의 정치·사회 갤러리에 활발하게 글을 올리는 사람들로 특히 김씨는 논리 정연한 글을 많이 올려 회원 사이에서 ‘여신’으로 불릴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3년 전부터 이 사이트에서 활동해온 두 사람은 진보적인 성향의 글을 함께 올리며 가깝게 지내왔다. 그러나 김씨가 지난해 초중반부터 갑자기 보수 성향의 글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갈등이 깊어졌다.
고졸에 직업이 없는 백씨는 주로 고(故)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성과를 높이 평가하며 지지 글을 올렸다. 반면 김씨는 이를 반박하는 글로 첨예하게 맞섰다. 백씨는 감정이 상했고, 김씨와 서로 사생활을 언급하거나 ‘○새끼’ ‘○녀’ 등 심한 욕설을 주고받는 등 진흙탕 싸움을 벌였다.
백씨가 김씨에 대한 이른바 ‘신상 털기’를 하면서 성적인 모욕감까지 주자 둘의 관계는 최악이 됐다. 김씨가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고, 백씨는 지난해 9월 사과의 대자보 사진을 사이트에 올렸다. 이를 계기로 김씨는 ‘정의의 심판자’를 자처하며 백씨를 더욱 몰아붙였다. 백씨는 3개월 전부터 범행을 치밀하게 준비했고, 모 채팅 사이트를 통해 김씨의 얼굴과 주거지를 알아낸 뒤 흉기를 구입해 5일 광주에서 부산으로 갔다. 백씨는 부산의 찜질방과 고시텔을 전전하며 김씨의 동선을 파악한 뒤 범행했다.
익명성을 무기로 상대방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과도하게 비난하다 결국 자존심 싸움이 됐고 살인으로까지 이어졌다.
백씨는 범행 뒤에도 5시간 만에 사이트에 김씨 살해 사실을 암시하는 패러디물을 올렸다가 삭제하기도 했다. 그는 고시텔에 은신해 있다가 16일 오후 9시45분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 관계자는 “백씨는 범행에 사용한 흉기 2개와 옷 등을 그대로 갖고 있었고 죄의식을 거의 느끼지 않는 듯 당당하게 범행 과정을 설명하는 등 사이코패스를 연상하게 했다”고 말했다.
부산교대 황홍섭(사회교육) 교수는 “소모적인 논쟁과 극단적인 용어 사용을 자제하는 등 성숙하고 발전적인 토론문화 정착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부산=윤봉학 기자 bhy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