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정철훈] 레닌기치를 읽는 시인

입력 2013-07-17 17:43


1991년 10월 5일, 경찰청 보안국은 구소련 카자흐공화국에서 발행되던 한인신문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영인본을 인쇄 중이던 둥지문화사 박모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이적표현물 제작) 혐의로 연행했다. 경찰은 당시 ‘레닌기치’ 복사본 2만5000부를 압수했는데, 이는 그해 4월 미국 의회 한국과에 요청해 입수한 사본이었다. 그때는 한·소 수교가 이루어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아 ‘레닌기치’를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의 국가이념을 표방한 이적표현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레닌기치’는 우리 학계에서 중앙아 고려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사료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다.

지난달 카자흐공화국 알마티에서 만난 최석(55) 시인은 ‘레닌기치’를 샅샅이 뒤져 고려인의 삶과 애환이 담긴 문학작품을 발굴하고 자신이 만드는 잡지 ‘고려문화’에 재수록하는 등 고려인 문화를 현재의 층위에서 탐색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가 “단순히 사회주의 문학으로만 알려진 고려인 문학의 참모습을 발굴해 알리려고 한다”는 취지로 ‘고려문화’를 창간한 것은 2006년 12월. 창간 6년 만인 2012년 12월 제4호를 발간했으니, 한 호를 발행하는 데 때로는 2∼3년이 걸릴지언정 그는 400쪽 가까운 책을 혼자 기획하고 혼자 글을 쓰는 ‘1인 잡지’ 발행인이었다. 그나마 2011년 발간된 3호부터 정호웅 홍익대 교수와 이승하 중앙대 교수의 글이 실렸고 4호엔 이명재 중앙대 명예교수의 단편 ‘싸바꼬예드 아리랑’이 실리는 등 한국문단과 긴밀히 소통하고 있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최 시인은 1996년 알마티로 이민을 왔으니 올해로 17년째다. 국적은 한국이지만 영주권을 취득해 시작한 사업이 세탁소였다. 현지인들이 겨울이면 즐겨 입는 가죽옷을 전문적으로 세탁해 지금은 어느 정도 기반도 닦았지만 처음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상납 요구에 떼강도까지 당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사업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다독일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인 문화에 대한 남다른 애착과 집착 덕분이었다. 중앙아 고려인들이 1937년 강제이주 초창기에 이방인으로 살았듯 그 역시 알마티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

최 시인이 자주 찾는 곳이 알마티 교외의 부른다이 공동묘지다. “친했던 고려인의 하관을 마치고 온 후로/ 부른다이, 모래 한 점 섞이지 않은/ 대지의 속살을 만지고 난 후로/ 문득 이곳에 뼈를 묻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업보이거늘/ 살고 죽는 일이 어디 내 소관일까 마는”(최석 ‘부른다이 가는 길’ 일부)

그날도 그는 나를 부른다이로 안내하며 이렇게 말했다. “고려인들의 수기를 보면 첫 정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대해 회상이 있어요. 발목을 덮는 흙먼지가 바람에 날리면서 지형이 바뀔 정도로 건조한 땅이었다는 것인데, 부른다이의 흙이 그 장면을 연상시키곤 하지요.”

그러고 보니 부른다이의 흙은 시멘트 가루처럼 미세한 분말이어서 비만 오면 발목까지 빠지는 진흙 벌판으로 변하기 일쑤였다. 이런 애환과 비탄을 기록한 신문이 또한 ‘레닌기치’이다.

‘레닌기치’의 전신은 1923년 3월 연해주에서 창간된 ‘선봉’이다. ‘선봉’은 37년 강제이주 당해 연도에 잠시 발행을 중단했을 뿐 38년 5월 카자흐 크질오르다에서 ‘레닌기치’로 개명해 계속 발간됐고 91년 5월 제호가 ‘고려일보’로 바뀌기 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레닌기치’는 구소련 영내에서 간행되는 공화국 간 신문이었기에 고려인들은 이 지면을 통해 혼인이나 부음 소식을 들었으며 문학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다. ‘레닌기치’의 사료적 가치는 그만큼 중차대하다. 그렇기에 이제는 한 개인이 아니라 우리 정부가 나서서 ‘레닌기치’의 영인본을 아카이브로 만들어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미 20여년 전 미 의회 한국과가 소장하고 있던 ‘레닌기치’ 영인본을 한국에서는 왜 찾아볼 수 없는지 생각해볼 문제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