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봉남 (5) 1984년 4000호 大作 ‘영광’ 2년 반만에 완성해
입력 2013-07-17 17:07
1981년, 3년 뒤면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온 지 100주년, 가톨릭이 들어온 지 200주년이 된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이를 기념하는 작품을 제작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작비용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아뿔싸, 작품 제작비용이 집 한 채 값이라니….” 비용 문제로 고민하고 기도하다 결국 살고 있는 집을 팔아 작업을 하기로 했다.
마침 남산 밑 서울 후암동에 있던 학교 하나가 수색 쪽으로 이사를 가면서 교실이 비어 있었다. 역사자료부터 수집했다. 프랑스에 그림 재료도 주문했다. 주문한 재료가 6개월 만에 도착해 작업이 지연되기도 했다.
작품 제목은 연구 끝에 ‘영광’이라 지었다. 주제를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누었다. 과거는 조선시대 의상으로 순교자들을 표현했다. 또 미래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한국으로부터 세계로 뻗어가는 내용으로 그렸다. 현재 부분은 남과 북의 5000만 인구를 500명의 합창단으로 배치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마침 내가 학교 강사를 맡고 있었기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을 스케치할 수 있었고 500명의 합창단을 그려낼 수 있었다.
한국교회의 암울한 과거를 밝고 투명하게 그리고 싶었다. 한국교회가 희망의 빛이 되길, 고통과 환란 속에서도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뚝 일어서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1984년, 신앙고백적인 작품을 2년 반 걸려 완성했다. 4000호의 대작 ‘영광’을 부활절 아침에 완성하고 마침내 사인을 했다.
‘영광’ 작품이 KBS TV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에 방영됐다. 방영 후 많은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런데 대부분은 이 작품을 기증해주길 원했다. 모 이단 교회에서는 집 네 채 값을 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내가 몇 년 동안 그린 성화를 이단에게 넘겨줄 수는 없었다. 대형 작품이라 국내에서는 전시할 공간이 없었고 창고에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형편이 넉넉지 못해 그 흔한 발표회도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20년쯤 지난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그는 한국 정부의 문화부에 연락하니 미술협회를 소개해줬고 미술협회에서 내 주소를 알려줘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한국인인 그 젊은 청년은 프랑스 정부에서 왔다며 자기소개를 했다. 자신은 전통 있는 루브르박물관 대학을 나왔으며 파리 인근에 있는 국립 에브리 미술관 측의 심부름으로 찾아왔다고 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에브리 미술관 관장이 어느 날 60 평생 처음 보는 훌륭한 동양 성화를 봤다며 그림책을 보여주고는 “이 그림을 그린 이가 당신나라 사람 아니냐”고 물었다. 자세히 살펴보고 “한국사람 작품이 맞다”고 답하니 “프랑스 정부 이름으로 초대할 테니 한국에 가서 찾아보라”고 했다. 그 청년은 실제 초청장까지 가지고 왔다.
2006년 4월 1일부터 25일까지 프랑스 국립 에브리 미술관에서 초대 개인전을 성대하게 가졌다. 프랑스 문화계 인사들과 공무원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한국사람은 나를 포함해 주프랑스 대사 부부와 통역 등 4명뿐이었다. 이 전시는 미술관 측의 요청으로 같은 해 12월 30일까지 연장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작품은 국내에 소장되지 못했다. 전시회를 장기간 열어주는 바람에 지금까지 프랑스 국립 에브리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