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자루로 살인 누명… 법원 “26억 배상”

입력 2013-07-17 05:06

군사독재 시절 경찰 간부의 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15년간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정원섭(79)씨에게 국가가 26억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법원은 “법치국가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면서도 당시 유죄를 선고한 재판부에는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

정씨는 1972년 9월 27일 춘천경찰서 파출소장 딸 피살 사건 범인으로 지목됐다. 당시 정씨가 운영하던 만화방에 피해자가 자주 다녔다는 게 이유였다. 정씨는 경찰관들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받다 10월 10일 허위 자백을 했다. 내무부가 ‘범인을 잡아오지 못하면 관계자들을 문책하겠다’며 선포한 ‘시한부 검거령’의 검거 시한이었다.

경찰은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과 빗을 증거로 제시했다. 당시 아홉살이던 정씨의 아들은 연필이 자기 것이라고 말했고, 가혹행위를 당한 가게 종업원은 빗의 주인이 정씨라고 허위 자백했다. 정씨는 강간치상과 살인 혐의로 같은 해 11월 기소됐다.

정씨는 재판에서 “경찰의 가혹행위로 허위 자백을 했다”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가게 종업원은 빗이 정씨의 것이 아니라고 증언했고, 정씨의 아내는 “경찰이 아들의 필통을 가져오라고 해서 갖다 준 일이 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씨는 이듬해 11월 무기징역형을 확정받고 15년을 복역한 뒤 모범수로 가석방됐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의 줄거리와 비슷하게 누명을 쓴 정씨는 2009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심 재판부는 “정씨는 수사 과정에서 최소한의 권리와 적법절차를 보장받지 못했다”며 “마지막 희망이었다는 법원마저 그의 호소를 충분히 경청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던 당시 재판부에 법적 책임은 없다고 봤다. 서울중앙지법 민사33부(부장판사 박평균)는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면서도 “재판 과정에서 불법행위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고 16일 밝혔다. 정씨 측은 “법원이 강압에 의한 자백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불법행위를 했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담당 법관이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으로 재판을 했거나 허위 자백이 충분히 의심되는 데도 심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