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 칼럼] 일본, 너는 우리의 운명
입력 2013-07-16 17:55
일본중세사가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일본의 정체성은 동아시아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분명해진다고 했다. 저서 ‘일본이란 무엇인가’(2000)에서 그는 거꾸로 펼쳐놓은 지도를 가리키면서 “동해(그의 표현으로는 ‘일본해’)는 커다란 내해(內海)”라고 말한다.
지도(사진)는 동해 쪽에 접해 있는 일본 도야마(富山)현이 건설성 국토지리원의 승인을 얻어 1994년 제작한 것이다. 처음 이 지도를 보면서 한·일은 정말 운명처럼 얽혀 있음을 실감했다. 그간 일본을 관찰하며 배우고 익혀온 지 30여년이지만 이만큼 강렬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아미노 교수의 의도는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일본이 고립적으로 존재한 적은 없었다는 주장을 일본 학계에 환기하는 데 있다. 침략과 전쟁을 해왔으나 그럼에도 일본은 동아시아의 구성원이었고 그 지위는 앞으로도 변치 않으리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서 동떨어져 있는 태평양 상의 섬나라가 아니라 내해로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아미노 교수의 발상은 일본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이다. 그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있다. 우리에겐 배일(排日) 의식이 깊이 뿌리내려 있어서 일본에 대해 친근감보다 적대감이 앞서며 교감하기보다 철저하게 외부화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해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의 일본 인식은 매우 이중적이다. 역사 문제에 대해서는 기꺼이 반일의 기수가 되고 경제·기술대국 일본에 대해서는 부러워하며 배우기에 주저함이 없다. 일본의 장기 불황과 경기 침체로 인해 일본 배우기 붐은 거의 사라진 듯하나 법·제도 운용부터 저출산·고령사회 문제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사례는 참고해야 할 내용이 적지 않다.
이렇듯 한·일은 지리적 운명공동체에 속해 있다. 양국은 서로 운명처럼 태고 적부터 그 자리에 붙박여 있었다.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1923∼1996)는 김해를 답사하는 자리에서 일제 때 일본의 어용 사학자들이 주장했던 ‘임나일본부설’을 부인하면서 어쩌면 한반도 남해안은 일본과 고대부터 쉽게 교류했었기 때문에 나온 억측이었을 것이라고 볼 정도다(‘한국기행’, 1972).
이웃이었기에 운명처럼 침략도 있었고 전쟁도 했다. 문제는 그것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역사 왜곡이 반복되고 있고 침략의 뒷수습이라고 할 징용자·일본군위안부 등에 대한 배상 문제도 미해결이다. 독도를 둘러싼 억지 주장까지, 양국을 감싸고 있는 난제들은 산적해 있다.
오는 21일 일본 참의원 선거는 양국 간에 또 한 번 파란을 예고하고 있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자민당은 이번 선거에서 압승해 두 번 다시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일본국헌법을 바꾸겠다고 벼른다. 개정 결의 요건인 중의원 3분의 2선은 이미 확보했으니 참의원 3분의 2선만 돌파하면 된다는 입장이다.
최근 아베노믹스가 주춤하는 바람에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이고는 있으나 일본 언론들은 자민당의 압승을 예고하고 있다. 헌법 개정이 가시권으로 들어온 셈인데 이럴 때일수록 지리적 운명공동체의 뚝심이 필요하다. 엇나가기만 하는 이웃이지만 데면데면만 해서는 아무것도 풀 수 없고 얻어낼 수 없으니 하는 말이다.
황정민과 전도연이 열연한 영화 ‘너는 내 운명’(2005)에서 순박한 시골청년 석중(황정민)은 다방 아가씨 은하(전도연)에게 폭풍 사랑을 바친다. 과거가 복잡하고 심지어 에이즈에 걸려 몸을 파는 자리로까지 밀려난 은하에게 전폭적인 사랑을 쏟는 석중의 행보는 영화 속 이야기만은 아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하니.
그래도 일본을 향해 ‘너는 우리의 운명’이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더구나 같은 피붙이인 북한의 패악에도 어찌 하지 못하는 판국이 아닌가. 그래도 어쩌겠나. 일본의 행보가 곧 우리의 운명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으니 만나서 주장하고 또 설득하는 수밖에. 내해의 평화를 위하여.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