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서봉남 (4) “기독미술 불모지 한국을 깨워라” 15년만의 기적

입력 2013-07-16 17:37


기독교미술에 대한 공부를 깊이 있게 해보려고 여기저기 알아봤다. 전국 대학을 찾아보니 ‘불교미술과’는 있는데 ‘기독교미술과’는 단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는 수 없이 독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곳저곳 서점에 들러 기독교미술에 관한 서적을 찾았다. 하지만 관련 책이 없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도서관이나 서울 청계천 인근 헌책방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기독교미술’이란 책이나 글자는 눈에 띄지 않았다.

옛 직장인 신문사에도 들러 창간호부터 샅샅이 훑어봤다. 그러나 서양의 기독교명화를 소개하는 글은 있었지만 기독교미술에 대한 기사나 서적은 찾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달란트가 이 때문이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됐다.

본격적으로 기독교미술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미술에 관련되는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전국 곳곳을 돌아다녔다. 자료를 구할 때면 뛸 듯이 기뻤다. 사진도 찍었다. 특별히 일본과 중국, 인도, 터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영국 등 해외에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15년 뒤 드디어 ‘기독교미술사’(도서출판 집문당, 1994)라는 제목의 책을 국내 최초로 발간했다.

자료수집 과정에서 외국 자료가 필요할 때가 많았다. 경제력이 없는 나로서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한데 하나님께서 그때그때 찾아가게 하시고 자료를 마련해주셨다.

예를 들면 모 봉사단체에서 연락이 왔다. 일본 오사카에서 국제대회에 각 문화대표를 선정했는데 내가 화가 대표로 선정됐으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모든 비용은 주최 측에서 부담했다.

일본에서 룸메이트는 남자 무용수 H선생이었다. 오전에는 회의를 하고 세미나 등 스케줄대로 진행하는데 H선생이 어느날 “서 선생님, 오늘은 세미나 빠지고 나하고 시내구경 갑시다. 갈 곳이 있는데….”

둘은 의견이 잘 맞았다. 세미나장에 가질 않고 뒷문으로 나가 택시를 탔다. H선생은 일본에 몇 번 와서 길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시내 어느 극장 앞에서 내렸는데 “서 선생님, 내가 갔다 올 곳이 있으니 지금부터 각자 시내구경하고 2시간 뒤 극장 앞에서 다시 만납시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낯선 일본 땅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한데 건너편에 헌 책방 골목이 있어서 그곳을 둘러보게 됐다. 절로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터져 나왔다. 바로 많은 책 속에 ‘그리스도미술’이란 책이 눈에 들어왔다. 너무 반가워 관련 책을 열 권이나 샀다.

1987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고 첫 문화교류가 있을 때 방송과 문학, 미술, 음악, 무용 등 나를 포함한 예술가 20여명이 초대를 받았다. 대우그룹에서 비용을 지원해 20일 동안 중국을 방문했다. 시안 등에서 경교비(景敎碑)를 비롯해 13세기 기독교미술 자료를 수집했다.

이 무렵 28개국이 참여하는 국제예술올림픽이 인도 델리에서 열렸다. 한국대표로 심사를 한 뒤 여유시간에는 인도의 기독교미술 자료를 수집했다. 시간이 부족해 미비한 점들이 많았는데, 하나님께서 이후에 두 번을 더 가게 해 주셨다. 인도미술협회 초청이어서 비용 한 푼 들지 않고 기독교미술 자료를 구했다.

이런저런 일로 32개국을 다니며 기독교미술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국교회에 기독교미술의 필요성을 알리는 글들을 교계 신문 잡지에 기고했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