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성낙] 루터가 단 사흘 머문 곳
입력 2013-07-15 18:01
“괴테가 엉덩이를 댄 곳도 역사적 유적지로 만드는 인문적 공감대 감동스러워”
학창 시절을 보낸 마음의 고향을 찾아가는 길목에 ‘대학 도시 마르부르크’라는 낯익은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그 표지판을 보니 자연스레 그 도시의 역사 이야기가 떠올랐다.
500여 년 전 독일에서 종교 개혁이 싹틀 무렵의 일이다. 헤센 지방의 젊은 태수 필리프(Landgraf Phillip)는 마르틴 루터가 주창한 종교 개혁에 과감히 가담하며 마르부르크 대학을 설립했다. 이 마르부르크 대학은 기독교 대학의 효시로 훗날 필리프스 대학이라 일컫게 되었다. 이처럼 마르부르크는 루터 및 필리프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는 도시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 엘리자베트 교회나 루터 교회는 13세기 고딕 시대의 전형적 건축미를 자랑한다. 유럽의 많은 도시가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성곽을 중심으로 발달했듯이 마르부르크 또한 마찬가지다. 옛 도시답게 좁고 꾸불꾸불한 길에 즐비하게 늘어선 전통 가옥들이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더해 거리를 산책하는 이의 마음을 더욱 여유롭게 만든다.
특히 옛 가옥 출입문 근처에는 ‘법학 교수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가 머물던 곳(1803∼1808)’, ‘낭만주의 작가 베티나 폰 아르민이 살던 곳(1785∼1859)’, ‘동화 작가 그림 형제가 머물던 곳(1802∼1808)’, ‘1900∼1910년, 알프레트 베게너가 연구를 수행하면서 대륙이동설을 정리한 곳(물리학연구소)’, ‘러시아 노벨문학상 수상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는 1912년 필리프스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같은 표지판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요컨대 이런 표지판이 도시와 대학의 오랜 역사를 자연스레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 검은색 배경에 황금색으로 쓰인 작은 표지판 하나가 빛을 발하며 시야에 들어왔다. ‘1529년, 이곳에서 마르틴 루터 박사가 지냈다(Hier wohnte Dr. Martin Luther 1529).’ 그 표지판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 지역 역사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루터는 20대의 필리프 태수가 종교 개혁에 동참하자 친히 마르부르크를 찾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당시 이 지역의 종교 행사에 참여하며 그 여관에서 3일간을 지냈다는 것이다.
한편 아름답고 낭만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고도(古都) 하이델베르크에도 산중턱에 고풍스러운 성곽이 있다. 이 성곽의 입구인 큰 문을 연결하는 석조 다리 난간에 ‘볼프강 괴테가 여기에 앉아 스케치를 했다’는 문구가 새겨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문호 괴테의 ‘엉덩이’가 닿은 곳조차 ‘성역화’하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독일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은 과연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수도 서울은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다. 결코 짧지 않은 역사다. 그러나 600년 세월의 역사적 흔적은 상대적으로 ‘너무 빈약하다.’ 정말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땅의 풍광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옮긴 조선 후기 진수산경의 화가 겸재 정선, 대명필가인 추사 김정희 생가나 성웅 이순신 생가는 고사하고 성왕 세종대왕의 생가는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 그 생각을 하면 ‘식은땀’이 날 지경이다. 너무도 초라하고 부끄럽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들의 추모비나 기념관이 들어서는 것은 역사적·시대적 ‘새치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독일은 루터가 단 3일간 유숙했다는 곳을 역사적 유적지로 만들고, 대문호 괴테가 ‘엉덩이’를 댄 곳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챙기는 그런 모습에서 독일 시민들의 역사 인식의 눈높이를 알 수 있다. 심지어 괴테가 예약했다가 취소한 여관에는 ‘괴테가 머물 뻔한 여관’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필자는 이것을 얄팍한 상술로 보기보다 괴테라는 세계적 문호에 대한 국민적 경외심과 인문적 공감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욱더 감동스럽다.
용재 백낙준(1895∼1985)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결코 왜곡해서는 아니 되지만 작은 것부터 챙기고 가꾸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선생의 이런 가르침을 새삼 반추하고 다시 반추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성낙 가천대 명예총장 현대미술관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