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아프리카를 위로하라

입력 2013-07-14 17:28 수정 2013-07-14 15:45


강도 당한뒤 달라진 시선…

“식민 통치와 인종차별 정책에

아! 흑인도 강도 당했구나”


2008년 12월 크리스마스 며칠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레노스터폰테인 마을에 있는 공동생활센터에서 더비 마을 교회의 흑인 학생 10여명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 뒤 편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성경을 암송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총을 든 강도 열댓 명이 들이닥쳤습니다. 3시간 동안 모두를 묶어놓고 저를 비롯한 한국인 선교사들을 이리 저리 데리고 다니며 얼굴과 몸을 다리미로 지지는 등 상해를 입혔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자동차 2대를 포함해 여러 귀중품을 가져갔습니다.

그들이 달아난 직후 경비회사 직원과 경찰이 와서 선교사들과 흑인 스태프들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 결과 용의자를 지목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강도를 모의한 자는 이곳 공동생활센터에서 1년간 성경을 공부하고 메리띵 마을의 교회에서 유치원 선생으로 오랫동안 함께 사역했던 딸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또 복면을 쓴 강도 중 한 명의 체형이 어디서 많이 본 듯했는데 그 역시 이 센터에서 1년 동안 우리와 같이 살았던 청년이었습니다.

그 시간이 지나니 여러 감정이 다양하게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험한 순간을 만날 정도로 삶을 잘못 살아온 것 같지는 않으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또 강도 가운데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자그마한 청년 하나가 다리미로 내 얼굴을 지진 것을 생각하면 수치심이 들고 화도 났습니다. 한편으로는 밤이 되면 또다시 누가 들이닥칠까 두렵기도 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머나먼 미국 시카고에서 이곳 남아공으로 위로자 다섯 분이 찾아왔습니다. 강도를 당한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찬양과 기도로 며칠을 함께 보냈지요. 그러다 이곳을 잠깐이라도 떠나 있자며 또 며칠 동안 같이 여행을 다녔습니다. 많이 웃었고, 감동의 눈물도 흘렸습니다.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그동안 복잡하게 꼬여 있던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위로가 된 것입니다. 새로운 힘과 비전도 생겨났습니다.

시카고 한인교회의 서 목사님을 비롯한 위로자 다섯 분은 우리가 강도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미션 911팀’이란 팀 이름까지 짓고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오로지 강도 만난 자들을 위로하러 오신 것입니다. 목회하느라 짬을 내기 어렵거나 회사와 상점을 운영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분들이고 재정적으로 절대로 이 자리까지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거나 아픈 가족을 돌보던 분도 있었는데, 모든 일상을 멈추고 오직 강도를 당해 공황상태에 빠진 선교사들을 위해 부리나케 달려와 주셨습니다.

이들 미션 911팀은 연말에 여러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시간을 가질 때마다 ‘남아공을 위로하라! 남아공을 위로하라!’는 소리가 마음속에서 되뇌어져 가만히 있기가 어려웠다고 얘기해줬습니다. 이들은 같이 강도당한 것처럼 가슴 저려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를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며 아픈 상처를 싸매줬습니다.

그 꿈같은 며칠이 지나 미션 911팀도 모두 돌아가고 난 후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자동차를 타고 이 도시의 늘 다니는 길을 지나가면서 뜨거운 햇빛 아래를 걸어 다니는 흑인들의 눈빛을 보니 그 눈이 예전과 달리 유난히 크게 보였습니다. 삶의 고난에 찌든 얼굴 표정이 모두 그 강도들 같아 보여 순간 마음이 섬뜩했는데, 그 짧은 순간에 또 다른 느낌도 함께 다가왔습니다.

‘아, 이들도 모두 강도를 당한 사람들이구나! 이들도 억울하구나! 가난으로 인한 슬픔과 분노도 속에 모두 담겨 있구나! 식민지 시절을 통해서, 인종차별 정책을 지나면서 많이들 아팠겠구나!’

그래서 이들이 그렇게 거짓말을 쉽게 하는 것인가 싶었습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고용주가 닦달하면 어떤 영문인지도 모른 채 자기는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하는 이 흑인들의 겁에 질린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매너 없고 감사를 모르는 흑인들을 보며 때로는 사람 같지 않다고 볼멘소리를 혼자 스스로에게 하곤 했는데 그 순간들이 무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도 집에 가면 배고파서 우는 자식들이 있고, 입을 옷이 엉성해 추위에 떠는 형제들이 있으며, 병들어 주체하지 못하는 몸으로 다 부서져 침대 같지도 않은 곳에서 웅크리고 누워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노인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온통 원망과 한숨인 것이 조금씩 이해가 됐습니다.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로 각국의 수많은 관광객이 보러 오는 ‘빅토리아 폭포’를 놓고 폭포의 원래 이름이 ‘모시 오아 툰야’라고 강조한 짐바브웨 출신 불법체류자의 분노에 찬 음성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현지인들이 ‘천둥소리가 나는 연기’라고 불러온 이 폭포는 1855년 영국 탐험가 리빙스턴이 발견한 뒤 당시 영국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 폭포라고 멋대로 명명한 것입니다.

백인 정당과 백인 교회(Dutch Reformed Church)들이 흑인들을 압축기에 집어넣고 피를 뽑아 자기네들의 행복을 위해 사용했다는, 인종차별정책(Apartheid)의 실상을 보여주는 고등학교 3학년 교과서 삽화가 무섭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국 신학생들이 남아공으로 공부하러 와서 학위를 따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곳 흑인 목회자들은 ‘신학은 백인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자기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교회와 목사를 인정합니다. 이런 틀에 동의할 수는 없어도 그 정서는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조상 때부터 내려온 토속적인 신앙을 버리지 않은 채 진정과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그 미련과 고집에 대해 도리어 연민의 감정이 생겼습니다.

어떤 교통경찰이 자기 마음대로 벌금을 아무렇게나 매겨놓고선 대신 뒷돈을 달라고 요구한 것을 가까운 경찰에게 불평했더니 “달라고 하면 주라”는 막말에 가까운 답변이 돌아온 것이 그렇게 무례하지만은 않은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종차별정책이 끝나고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들어서자 ‘쟌스머트 국제공항’의 이름이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으로 바뀌더니 다시 ‘OR 탐보 국제공항’으로 개명됐습니다. 이렇게 이름이 바뀔 때마다 상당한 돈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하는 그들의 심정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국 선교사들의 독특한 역할이 이 땅 아프리카에 크게 있겠다 싶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다시 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돼서 이 부족하고 연약한 흑인들을 많이 위로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 공부만 하러 오지 말고 주님을 대신해 위로자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물질을 벌어 가난한 친구들을 위해 나누기를 기뻐하는 크리스천 기업인들이 이 땅을 많이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흑인들이 성경적 가치관을 삶 속에 깊이 나타내며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이사야 40:1)

조성수 남아共 선교사

● 조성수 선교사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 소속 선교사, GP선교회 협력선교사

△1956년생. 84년 성결대 신학과 졸업

△87년부터 5년간 보츠와나에서 사역

△95년부터 ‘월간 한국인 선교사’ 편집인

△99년부터 남아공 루스텐버그에서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