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재난의 소식들을 들으면서

입력 2013-07-14 17:16


죽을병에 걸린 사람이 한 유능한 의사를 만났다. 그 의사의 수술 덕분에 곧 죽을 사람이 살아나게 되었다. 환자와 그의 가족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기쁨과 고마움의 뜻으로 큰 잔치를 벌였다. 물론 그 잔치의 최고의 손님은 목숨을 건져준 의사 선생님이었다. 이 의사 역시 뿌듯했다. 자신의 손으로 수술한 환자가 일단 죽음에서 살아났으니 말이다. 그런데 기뻐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보면 볼수록 의사는 마음 한 구석에서부터 올라오는 미묘한 찜찜함을 감출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환자는 당장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이런 건강으로는 길게 살아도 3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3년 뒤 이 잔치 자리는 분명히 통곡의 자리가 될 것이 뻔하다. ‘뭘 이렇게 기뻐할까. 3년 후에 또 죽을 텐데.’ 이것이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의사의 눈에는 안쓰럽게만 비춰졌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생들의 모습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사람은 좀처럼 자신의 한계, 즉 죽음 아래 놓인 한계상황을 실감하지 못한다. 실감하지 못하면 마치 ‘없는’ 것인 줄로 착각한다. 이것이 문제다. 그러기에 인생의 가장 위대한 깨달음은 다른 것이 아니다. 자신의 한계다. 내가 죽음의 한계상황 아래 있으며, 내가 가진 작은 것이 인생의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 않는다는 정직한 각성이다.

엘리야 앞에 있는 사르밧의 이방 여자를 보라.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겠다는 이 여인을 향해 엘리야는 도전한다. 그러지 말고, 그 양식을 먼저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인정머리 없는 치사한 요구가 아닌가. 아니다. 이것은 인생의 기초를 점검하자는 위대한 도전이다. ‘너의 작은 양식, 그건 어차피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어! 이것을 너의 손에서 놓을 생각이 없느냐. 어차피 인생의 대안이 되지 못하는 작은 양식, 그것을 손에서 놓고 인생의 기초를 바꿀 생각이 없느냐.’ 이것이다. 여인은 결국 놓는다. 그건 단지 한 끼 양식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이전의 인생의 기초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왜? 이 작은 양식이 자기 인생의 진정한 기초가 될 수 없음을 깨달았기에. 그야말로 위대한 각성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물과 건강이 작은 떡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른다. 그건 먹어도 죽고, 먹지 않아도 죽는다. 그것이 인생의 대안이 될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 않은가. 그런데 글쎄, 그 당연한 것을 모른다.

쥐 한 마리가 쥐덫에 잡혔다. 쥐는 끈끈이에 등짝이 붙은 채 최후의 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었을까. 쥐덫에 붙은 쇠고기 미끼를 한가롭게 뜯고 있었다. 인생의 모습도 비슷하다. 그러나 쇠고기 미끼와 같은 것이 인생의 기초가 될 수 없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을 모른 채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가. 지구촌 곳곳에서 들리는 재난 소식이 유달리 많은 요즘, 세상과 인생을 보며 안타까운 눈물 흘리시던 예수님이 생각난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