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신창호] 에어컨 단속 유감
입력 2013-07-14 18:21
고온다습한 한반도의 여름 날씨는 더위보다 습도로 악명이 높다. 하루 종일 습도 80%를 넘나드는 7∼8월은 세계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데 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전력 비상 때문에 에어컨이 있어도 마음대로 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00년 만에 가장 더운 6월이었던 지난달 초 청와대 회의에서 “저는 에어컨을 켜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모든 공공기관이 에어컨 가동을 멈췄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곧바로 출입문을 연 채 에어컨을 가동한 상점은 예외 없이 과태료를 부과하고 다중이용 건물·업소는 실내온도 26도, 관공서는 28도를 유지토록 하는 ‘에어컨 단속 지침’을 발표했다. 이내 도서관 백화점 은행 호텔 로비 등 어디에서도 만족스럽게 쾌적함을 느낄 만한 곳은 사라졌다. “더우면 은행에 가라”는 오래된 서민들의 피서대책 역시 무용지물이 됐다.
지난주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하는 동생을 만나러 갔다가 우연히 미국인 변호사 일행과 저녁을 함께 하게 됐다. 수백번 서울을 방문했던 이 변호사는 “대체 호텔 식당이 왜 이리 습하냐”고 불평을 해댔다. 이유를 설명해주자 그는 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절전? 그게 캠페인인가요 아니면 위반하면 처벌받게 돼 있는 법규인가요?” 나는 “캠페인이기도 하고 단속이기도 한데, 어쨌든 실내온도 26도를 안 지키면 식당 주인이 꽤 큰 벌금을 내야 한다”고 답해줬다. 그는 “에어컨 단속 법규가 진짜 법으로 명문화됐다는 거예요”라고 반문했다. 내가 “그런 건 아니다”고 하자 “그럼 정식 법도 아닌 걸로 벌금을 물리는 건데”라고 받아쳤다. 이 변호사는 끝내 “이건 민주주의가 아닌데…”라고 했다. 제 돈 주고 산 에어컨도 원하는 대로 켜지 못하게 하는 국가라면 ‘토탈리타리안(전체주의)’이라는 게 그네들 생각이었다. 결국 이 변호사는 사단을 냈다. 계산서를 보더니 부과된 10%의 봉사료를 절대 지불할 수 없다고 난리를 친 것이다. “고급식당에서 손님이 저녁을 먹으며 땀을 뻘뻘 흘렸는데 무슨 제대로 된 봉사를 했다는 겁니까. 봉사료는 못 줍니다.” “이 봉사료는 손님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된….” 옥신각신하던 끝에 논리싸움에서 밀린 한국인 지배인은 우리 일행을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직업상 자주 만나게 되는 공무원들 가운데는 사무실에서 땀을 뻘뻘 흘렸던 업무시간을 회상하기조차 싫어하는 경우가 흔하다. 어떤 공무원은 “섭씨 28도 이상에서 일하라고 하는 건 ‘공무원 너네는 능률 같은 건 필요 없는 족속이니 자리나 지켜’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고 흥분했다.
우리들에게 수 십 년 동안 ‘절전 캠페인’은 그저 에어컨 안 쓰고 전등 하나 더 끄는 일로만 여겨졌다. 그러는 사이 국민들이 아낀 전기는 전체 전력의 절반 이상을 쓰는 대기업 공장들에게 말도 안 될 만큼 싼 값에 공급돼 왔다. 반면 전체 전력의 3분의 1도 안 쓰는 평범한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은 매번 전기낭비의 주범으로 매도당했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GDP)이 2만3000달러에 이르러 선진국 진입이 코앞이다. 그런 나라에서 지상파 TV 저녁뉴스에 에어컨을 켠 채 출입문을 열었다는 이유로 벌금딱지를 받고 공무원들이 온도계를 들고 업소 실내온도를 재는가 하면, 에어컨을 세게 틀었다고 온갖 질책을 당해야 하는 식당주인의 얼굴이 방송된다. 대한민국의 여름이 진짜 이래도 되나.
신창호 정치부 차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