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엽제 판결 파장] 희망이 절망으로… 美제조사 상대 20년 소송 사실상 ‘끝’

입력 2013-07-12 18:22 수정 2013-07-13 00:19

베트남 전쟁은 40년 전 끝났지만, 전후 처리는 끝나지 않았다. 참전 군인들은 아직도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대법원은 12일 고엽제 피해자들이 미국 고엽제 제조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14년 만에 사실상 제조사의 손을 들어줬다. 피해자들이 처음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추진한 때로부터 20년 만이다.

◇13만명 원인 모를 병=1965년부터 73년까지 32만여명의 한국 장병이 베트남전에 파병됐다. 5000여명이 사망했고, 1만1000여명이 부상했다. 13만여명은 귀국 후 ‘원인을 알기 힘든 병’을 앓았다. 어떤 사람은 툭하면 코피를 흘렸고, 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온몸에 붉은 여드름이 솟기도 했다. 각종 암과 피부병이 생겼다. 기형아 자녀를 출산했고 태어난 아이가 이유 없이 신체마비 증상을 보였다.

모두 고엽제 후유증으로 의심됐다. 고엽제에는 ‘악마의 화학물질’로 불리는 다이옥신이 함유돼 있었다. 미국에서는 69년 이미 초미량의 다이옥신이 생체에 흡수돼도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를 일으킨다고 보고됐다. 그런데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약 7200만ℓ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적군의 은둔지와 무기 비밀수송로로 이용된 정글 및 경작지 등을 제거하는 목적이었다. 고엽제는 1960∼1971년까지 베트남 국토의 15%에 해당되는 2500만㎢의 광범위한 지역에 뿌려졌다. 이 중 80%에 해당하는 고엽제가 한국군 작전지역에 뿌려진 것으로 알려졌다.

◇20년에 걸친 소송=고엽제 피해자들은 93~94년 미국 캘리포니아 법원에 고엽제 피해보상 국제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미국 법원은 98년 “한국 대법원의 최종 승소 판결을 받아 미국에 집행소송을 제기하라”고 했다. 이듬해 피해자들은 서울중앙지법에 다우케미컬의 국내 특허권에 대한 가압류 신청을 냈다. 피해 보상에 대비한 것이었다. 서울중앙지법은 이 가압류 신청을 받아들였다.

피해자 1만6579명은 1인당 3억원씩 모두 5조1600억여원의 손해배상청구 본안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2002년 1심 재판부는 “현재까지 역학조사 결과로 고엽제 다이옥신 성분과 후유증 사이의 인과관계가 입증되지 않았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반면 2006년 2심 재판부는 미국 국립과학원 보고서 등을 근거로 “고엽제 후유증 대부분은 역학조사 결과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대법원 상고심에서 뒤집혔다. 대법원은 염소성여드름 환자 39명에게 1인당 600만~1400만원씩 4억659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다른 피해자의 청구는 모두 기각했다. 승소가 확정된 39명은 이번 확정판결을 근거로 미국에서 집행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염소성여드름 질병과 고엽제 간 인과관계를 여전히 인정하지 않고 있어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면서 실제 손해배상 청구에 나설지는 미지수다.

고엽제를 제조한 다우케미컬 측은 지금도 “미군은 병력을 보호하기 위해 전술적 목적으로 고엽제를 개발하고 사용했다”고 항변한다. 미국 정부의 요구에 따라 고엽제를 생산했기 때문에 책임이 없고 배상 문제는 한국과 미국 정부가 외교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 미국 법원은 일관되게 제조사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있다. 한편 고엽제 손해배상청구 사건의 기록은 500쪽 분량의 책 330권으로 모두 16만5000장이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