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하 칼럼] 풋내기 농부로 사는 기쁨

입력 2013-07-12 17:39


올해로 4년차 농부로 살고 있다. 은퇴 후 비로소 꿈을 이룬 것이다. 대단한 결심은 아니지만 소박하게나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원이 있었다. 형님의 배려로 강화도 고향 마을에 집을 짓고 농사지을 땅도 빌렸다. 아직 완전한 귀향은 못하고 여전히 서울을 기웃거리지만 나름대로 농부 시늉은 내고 있다.

돌아보니 흙을 만지고 맨발로 땅을 밟아본 지 50년이 훌쩍 넘었다. 시골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형제들과 함께 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소를 끌고 산에 가서 풀을 먹이고, 모내기철에는 논둑에서 못줄을 잡았던 기억이 아득하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인천으로 떠난 후 줄곧 도시생활을 했으니 풋내기 농사일이 실감 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평생 농부로 살아온 형님을 선생님으로 삼아 내 손으로 텃밭을 일구니 행복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형님은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그간 농촌은 참 많이 변했다. 기계는 첨단이 됐지만 더 이상 농사짓는 젊은이를 찾아보기가 어려워졌다. 지금 농촌의 주류인 노인 세대가 떠나면 앞으로 누가 농사를 지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도 든다.

첫 농사를 짓던 해, 제대로 해보겠다고 다짐하면서 장터 철물점에서 농기구를 구입했다. 씨앗을 사려고 종묘상에도 들렀다. 종묘상 주인은 “힘들게 텃밭 가꾸지 말고 웬만하면 사서 드시지요”라며 웃었다. 어설픈 내 모습이 농부 되기는 틀렸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용하게 일하는 재미를 붙였으니 더 없이 감사하다.

지금은 장마철이어서 쉬는 날도 더러 있지만, 비가 갠 후에는 다시 풀과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처음 농사를 시작할 때는 밭에 김 한번만 매주면 결실을 먹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잡풀은 매고 또 매도 끊임없이 자라났다. 곡식은 거름보다 호미에 큰다더니 가장 큰 일은 풀과 씨름하는 일이었다. 이젠 나 자신이 점점 농부의 생활패턴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농사를 지으며 배운 것은 농부의 마음이다. 그들은 바람이 불면 넘어지지 않도록 바람을 살피고, 비가 많이 오면 물이 고이지 않도록 물길을 잡는다. 비 온 뒤에는 탄저병을 예방하려고 방역에 나선다. 퇴비 대신 비료를 주고 김매듯 농약 주는 일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내 주장은 다분히 이상주의적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두 살 터울의 농부 형님은 늙은 농부의 노동환경을 헤아리지 않는 환경지상주의자들의 논리에 역정을 낼 정도다.

밭에 엎드려 고된 하루를 보낸 날은 그렇게 흐뭇할 수 없다. 심고 가꾸고 거두는 기쁨을 골프 취미에 비할 바 아니다. 토마토 농사 제대로 지으려면 땅에 50번, 줄기에 50번 그렇게 100번 이상 손길이 가야 한다지만 붉은 토마토를 따는 순간 그간의 수고는 다 잊게 된다. 생명에 대한 경외심마저 든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을까.

자연과 생명의 신비를 느끼며 감탄사를 연발하다보면 투자 대비 손해를 따지던 종묘상 주인의 계산이 틀렸음을 확신하게 된다. 자연을 사랑하니 상한 마음이 회복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물을 사랑스런 눈길로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산다. 그래서 인생이 호젓이 늙기보다 달콤하게 익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비 오는 날 마루에 앉아 신문을 보니 정치인들이 극성스럽게 다툰다. 뻔한 사실도 정파 이익이란 색안경을 쓰고 보니 갈등이 좁혀질 리 만무하다. 예전에 정치인들은 비록 시늉일지라도 농촌을 찾아와 농사일을 거들고 농민의 시름도 들어주곤 했다. 그들도 맨발로 땅을 밟고, 온종일 허리가 끊어지도록 김을 매다보면 세상을 보는 눈도 진실해지지 않을까 싶다.

옛말에 ‘상농은 땅을 가꾸고, 중농은 곡식을 가꾸고, 하농은 잡초를 가꾼다’고 했는데 정치인들이 허구한 날 남의 밭 잡초 탓만 해서야 되겠는가.

(사단법인 겨레사랑 이사장)

신경하 감독 약력=1941년 경기 강화 출생. 감리교신학대 명예신학박사. 기독교대한감리회 감독회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회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