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식의 정치학] 역사 고비마다 단식… 굶음으로써 채운 그들의 평가는?
입력 2013-07-13 04:00 수정 2013-07-13 18:39
최근 민주당 우원식, 윤후덕 의원이 ‘을(乙) 지키기’ 입법을 촉구하며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기간이 짧고 본인들이 피해 당사자는 아니어서 반향이 크진 않았지만 단식 동안 국회에서 몇몇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이 통과돼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도 있다.
이렇듯 정치권에서의 단식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해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자주 등장해 왔다. 특히 우리 현대 정치는 단식을 빼놓으면 어색할 정도로 중요 고비 때마다 강력한 투쟁수단으로서 자주 활용됐다. 그만큼 굴곡이 많은 현대사를 겪어왔다는 방증이고, 한편으로는 ‘타협’이 안 돼 결국 극단적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대치 정치’의 산물인 측면도 있다.
◇YS, DJ 등 역사의 줄기 바꾼 단식=경남 거제 ‘김영삼대통령 기록전시관’에 가면 앙상한 모습의 김 전 대통령이 병상에서 단식 중인 모습이 밀랍인형으로 제작돼 있다. 1983년 5월의 일로, YS는 전두환 정권 아래서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등을 내걸고 단식투쟁을 벌였다. 단식한 지 1주일을 넘어서자 정권은 강제로 입원시켰다. 하지만 병원에서도 단식이 이어져 23일간이나 지속됐다. 이 단식으로 YS 본인은 가택연금 해제를 얻어냈고, 이후 민주화 투쟁에도 기폭제가 돼 1987년 직선제 개헌을 이뤄내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이러니하게 1995년 김영삼 정권 하에서는 내란죄로 구속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구속에 항의해 20일 이상 옥중 및 병원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0년 10월에 지방자치제 도입 및 내각제 포기를 요구하며 13일간 단식투쟁했다. 현 지방자치제는 당시 DJ의 단식투쟁을 통해 쟁취됐다. 정권의 음해성 소문으로 추정되지만, 단식 때 YS는 보름달빵을 먹었고, DJ 역시 몰래 음식을 섭취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거물급 정치인들의 단식은 그 자체로도 강력한 투쟁이지만 지지자들의 투쟁의지를 고취시키는 부수적 효과도 크다. 인도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마하트마 간디도 생전에 20회 가까이 단식투쟁을 벌이며 독립투쟁을 이끌었다.
과거 군사 정권하에서는 민주 투사들의 옥중 단식이 많았다. 감옥에서의 단식은 몸은 비록 구금됐지만 투쟁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보이기 위한 차원이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수형생활을 더욱 고통스럽게 한다는 측면에서 감옥 밖 인사들에게 더 저항하라는 자극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1981년에 영국 당국에 의해 구속된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대원들이 몇 달째 이어진 옥중 집단단식으로 모두 10명이 탈진 끝에 숨진 안타까운 역사도 있다. 지금도 미국이 운영중인 관타나모 포로수용소의 이슬람 재소자들과 터키 감옥에 구금돼 있는 쿠르드족 양심수들, 이스라엘에 수감된 팔레스타인 포로들은 옥중 단식을 벌이고 있다.
◇요즘은 개별 이슈 반대한 단식 많아져=민주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단식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해외파병이나 글로벌 경제협정 체제에 반발한 단식투쟁이 늘어난 게 특징이다. 2003년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이 이라크 파병에 반대해 13일간 단식했고 민주노동당 강기갑 의원은 2005년에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하 쌀 협상에 반대해 20일 이상 단식투쟁했다. 2007년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반대해 당시 열린우리당 김근태, 천정배 의원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 등 정치인들의 단식이 줄을 이었다. 문 대표는 26일간, 천 의원은 25일간 단식해 YS가 보유하고 있던 최장 단식기록을 갈아 치웠다. 현재 정치인 최장 단식기록은 2007년 7월 제주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해 27일간 단식했던 당시 민주노동당 현애자 의원이 갖고 있다. 민주당 양승조 최고위원은 2010년 세종시 수정안 추진에 반대해 22일간 단식투쟁했다.
단식이 너무 흔해지다 보니 관심도가 많이 떨어진 측면도 있다. 또 일부 정치인들은 인기성 ‘보여주기’ 차원에서 단식한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결기 충만한 단식은 역사를 바꿀 수도 있지만, 인기를 노린 남발성 단식은 미래의 투쟁수단을 갉아먹는 일이 되기도 한다.
손병호 기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