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혈액형 성격론
입력 2013-07-12 18:33 수정 2013-07-12 20:21
인간의 DNA는 10억 개의 뉴클레오티드로 연결된 긴 사다리 모양이다. 때문에 쓸모없는 것을 제외하고 유용한 핵산들만의 조합으로 각각 다른 개체의 인간을 만드는 조합 수만 해도 지금까지 지구상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수보다 훨씬 많다.
그럼 운세는 어떨까. 점성술에 기초한 별자리운세는 12개밖에 되지 않고, 태어난 연도별로 표시되는 띠별 운세도 수십 개에 지나지 않는다. 새해마다 심심풀이로 보곤 하는 토정비결도 144괘에 불과하다. 살아가면서 복잡하게 얽히는 운명의 수 치곤 너무 적은 게 아닐까.
그런데 이보다 운명의 수가 더 적으면서도 해괴한 운명론이 있다. 혈액형이라는 과학의 탈을 뒤집어쓴 ‘혈액형 성격론’이 바로 그것이다.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이기적이면서 변덕스럽고 O형은 통이 크고 AB형은 이중적인 성격을 지녔다는 식이다.
이를 이용해 연애할 때 어떤 혈액형이 좋다거나 혈액형별 다이어트법, 혈액형별 공부법 등이 나돌고 있다. 최근엔 최강희 전 축구국가대표팀 감독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제기했던 ‘수비수로서의 적합한 혈액형론’이 SNS상에서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성격은 환경이나 양육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혈액형은 100% 유전이므로 성격을 혈액형으로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또 성격은 두뇌가 조절하는 데 비해 혈액형은 세포 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혈액형은 적혈구에 존재하는 항원에 의해 결정되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항원은 400개 이상이다. 수혈할 때 문제가 되는 항원만 해도 수십 개이므로 유독 ABO식 혈액형만 성격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혈액형 성격 풀이를 보면 꼭 내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그건 ‘바넘 효과’ 때문이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닌 보편적인 특성을 자신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혈액형이 중요시되는 건 수혈에 따른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다. 그러나 최근엔 특정 항원을 제거해 혈액형이 달라도 수혈이 가능한 연구가 시도되고 있다. 또 혈액형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장기 이식을 실시하는 ‘혈액형 부적합 장기이식’도 성공률이 매우 높아진 상태다.
인류의 몸속에 세워진 혈액형이란 바벨탑을 과학기술이 허물어뜨리고 있는 데 비해 혈액형 성격론이라는 해괴한 성벽은 점차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