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日 전범기업은 더 늦기 전에 회개의 촛불을 켜라
입력 2013-07-11 17:44
일제강점기 일본 기업들에 의해 강제로 혹사당했던 이들의 비원이 이루어졌다. 서울고법은 10일 일제강제징용 피해자 여운택(91)씨 등 4명이 신일본제철(옛 일본제철, 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1997년 일본에서 시작된 여씨 등의 법정 투쟁이 비로소 첫 승리를 거둔 것이다.
이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선 이 판결이 1, 2심에서 원고 패소 이후 지난해 5월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한 후 이뤄졌다는 점이다. 1, 2심이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에 바탕을 둔 일본 법원의 판결을 존중한 것이었다면 대법원의 원심 파기는 식민지 지배의 합법성을 부인하는 데서 출발했다. 이로써 비로소 강제징용의 반인륜적 의미가 부각됐다.
더 중요한 것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및 징용 피해를 우리 사회에 새롭게 환기(喚起)했다는 점이다. 이는 한·일 간 지배·피지배의 과거를 극복하자면 일본 정부뿐 아니라 당시의 징용자들을 군사시설 및 군수물자 공급의 첨병으로 이용해온 이른바 일본의 전범기업도 나서야 한다는 점을 의미한다.
전범기업은 강제징용자들을 받아들여 임금이나 수당은 제대로 주지 않은 채 제 잇속만을 챙긴 기업들을 말한다. 전범기업에 혹사당하고 무시당했던 이들은 오랫동안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이 가슴앓이만 해오다 87년 6월 민주화항쟁의 경험을 지켜보면서 법적 투쟁에 눈뜨기 시작했다. 1991년 김경석씨가 전범기업 니혼강관에 소송을 제기한 후 유사 소송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전범기업들은 한·일 간의 재산청구권 문제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을 통해 끝난 문제라는 입장을 앞세웠고 일본 법원이 이에 적극 동조했다. 여씨 등도 최고재판소(대법원)까지 갔지만 패소로 점철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 판결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다. 신일철주금 측은 같은 이유로 반발하며 상고할 태세이지만 옳은 해법이 아니다.
침략·과거사 반성에 열심인 독일에서조차 전범기업 관련 배상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처음 이 문제가 제기된 것은 90년대 초였으나 마침내 2000년 논란 끝에 독일 정부와 과거 전범기업들이 힘을 모아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재단(EVZ)’을 만들고 과거의 개인적 피해에 대해 일일이 보상하고 있다. 시작은 쉽지 않았으나 EVZ의 등장은 독일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 정부가 혹 보수층을 의식하느라 과거사 반성에 소홀한 것이라면 전범기업들이 EVZ와 같은 기구를 마련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구체적인 회개가 될 아니라 일본의 미래를 밝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일본 전범기업들은 더 늦기 전에 회개의 촛불을 스스로 밝혀야 마땅하다. 이미 고령인 피해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