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이영미] 아웃소싱 가족

입력 2013-07-11 17:43 수정 2013-07-11 22:10


기저귀와 물티슈, 약상자, 성경책. 반다지 위에 놓인 아흔 노모의 생필품들은 정갈해 보였다. 열심히 쓸고 닦은 가구는 반질반질했고, 환기 잘된 방안에는 뒷산에서 흘러들어온 한여름 나무 향이 은은했다. 일흔 넘은 아들이 방문객과 대화하는 그 잠깐의 시간. 할머니의 손가락이 손님용 냉오미자차 속으로 쑥 들어갔다. “안 돼요, 엄마.” 아들이 나직이 타이르며 유리컵을 치우는 사이, 며느리는 빨대 꽂은 두유팩을 시어머니 손에 쥐어주며 흘린 오미자차를 닦아냈다. 매끄럽고 능숙한 손길이었다.

1916년생 최옥희 여사는 올해 아흔일곱이다. 옥희씨의 치매가 악화되면서 아들 조영진씨 내외에게는 하루 네댓 번씩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고, 밥을 먹이는 노동의 날들이 시작됐다. 그리고 2년. 70대 아들 부부는 노모 수발에 관한 한 환상의 복식조가 됐다. 남편이 기저귀를 갈면 아내는 환기를 시키고, 아내가 옷을 벗기는 동안 남편은 갈아입을 옷을 챙겨 왔다.

얼마 전 만난 춘천의 옥희씨네는 20세기 가족의 유물처럼 보였다. 며느리는 중풍 걸린 시아버지의 대소변을 10년간 받아냈고, 공무원 아들 조씨는 퇴근 후 종일 누워있던 아버지를 씻겼다. 가족회의에서 치매 걸린 옥희씨의 요양원행을 논할 때 “내 부모를 내가 모셔야지”라며 기어이 뜯어 말린 건 며느리였다. 부부는 자녀에게도 헌신적이었다. 공무원 연금 절반을, 그러니까 노후의 절반을 포기해 두 아들 결혼자금을 마련한 부부는 치매 노모를 보살피는 와중에 손주 넷을 키우며 맞벌이 지원군 노릇도 했다. 사회가 가족에 기대하는 최대 임무를 부부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감당해 왔다. 물론 건강과 경제력이라는 조건이 갖춰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기준으로도 옥희씨네는 2013년 대한민국의 평균적 가족은 아니다. 과거의 가족이 평생 공동체였다면 오늘날 가족은 부부와 미성년 자녀로 이루어진 양육 공동체에 가깝다. 가족 내 세대간 약속은 오래 전 사라졌고, 부부 역시 자녀를 잘 키워 사회에 안착시키는 것을 목표로 모인 남녀의 계약관계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황혼이혼의 급증은 양육이 종료되는 순간 존재의미가 사라져버리는 오늘의 부부관계를 상징한다.

가족의 지평이 축소되면서 그간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나눠 지던 각종 역할과 의무는 줄줄이 ‘아웃소싱’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부모봉양은 노인요양보호의 영역으로, 임신·출산·양육은 산후조리원·신생아돌보미·보육교사까지 일련의 돌봄노동으로 전문화됐다. 혼자 사는 노인의 고독사를 감시하는 독거노인 돌보미가 생기고, 자녀의 등하교를 보살피고 방과 후 일상을 조직하는 각종 안전시스템과 방과후돌봄 서비스도 체계화돼 간다. 어떤 면에서 전방위적 아웃소싱은 개인의 생존전략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경쟁력 있는 노동력으로 살아남으려면 가족 멤버로서의 자아는 잠시 잊어야 한다.

이미 가족은 해체됐고 필요한 건 오직 더 많은 서비스일까. 해답은 더 풍성한 서비스가 아니라 가족에게 돌아갈 삶의 여유에 있다고 믿는다. 지금 외치고 갈구하는 수많은 사회서비스들 중 상당 부분은 우리가 다시 가족 구성원이 될 여유를 찾는 순간 불필요해질 것이다. 개인은 노동자이자, 딸이며, 엄마이자, 언니, 조카이면서 사촌의 얼굴을 모두 가질 수 있을 때 비로소 온전해진다. 신생아 돌봄 서비스 대신 육아휴직이, 요양원 대신 돌봄휴직이 자유로운 사회. 내가 꿈꾸는 건 그런 미래이다. 가족이 자꾸 작아지는 시대에 옥희씨네가 겪는 시대착오적 고난이 조금 부러워보였다.

이영미 정책기획부 차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