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눈부신 남프랑스 삶의 궤적 밟아가는 ‘오래된 현재’
입력 2013-07-11 17:21
불문학자 김화영 산문집 ‘여름의 묘약’
“1969년 어느 날 나는 엑상프로방스에 도착했다. 내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프랑스 외무성이 지정해준 곳이었다. 그 도시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던 나는 스물일곱이었고 혼자였다. 그날 이후 나의 삶은 프로방스를 향하여 밝고 넓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불문학자인 김화영(72) 고려대 명예교수가 산문집 ‘여름의 묘약’(문학동네)에 쓴 서문 ‘오래된 현재 1969∼2012’의 일부이다. 27세 풋풋한 청년이었던 그는 프랑스 엑상프로방스대학에서 ‘알베르 카뮈론’으로 박사학위 과정을 밟던 중 귀국해 1977년 신혼의 아내와 함께 프로방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첫 딸을 얻어 가족을 일궜던 그는 2012년 여름을 아내와 함께 다시 프로방스에서 보냈으니, 산문집은 그의 말대로 “긴 세월 동안 남프랑스의 여름빛이 숙성시킨 사랑의 묘약 이야기”이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다시 밟아가는 여정에서 그는 어떤 빛을 보았을까. “이 고장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빛과 그늘의 반점 사이로 미풍처럼 흔들리다가 고이고 고였다가는 흐르는 우리들 저마다의 삶의 순간과 순간이다. 그 위에 내려앉는 짧은 여름빛, 그 덧없음이 바로 우리가 행복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아닐까.”(210쪽)
뒤랑스 강을 낀 중세 마을 뤼르스를 근거지로 활동한 장 지오노(1895∼1970)의 집 ‘르 파라이스’로 가던 중 카페에 들러 ‘망탈로’(얼음물에 탄 박하시럽)를 시켜놓고 김화영은 상념에 잠긴다. 마을 성문 위 벽면에 ‘나는 순간 속에 풍부하게 있다’라는 마을 사람들의 좌우명이 새겨져 있을 정도이니, 뤼르스의 문화적 세련미는 짐작하고 남는다.
하지만 김화영은 이내 1952년 8월 5일 뤼르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도미니시 사건’을 떠올린다. 영국 런던대학 생화학 교수 부부와 딸이 휴가를 왔다가 무참하게 살해된 이 사건의 범인은 인근 농장에 사는 도미니시로 밝혀진다. 그가 살인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지오노는 사법부의 형식적 절차와 현실 사이에 큰 괴리가 있음을 깨닫고 “진정한 범인은 프랑스 사법부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도미니시는 이후 종신형으로 감형된 후 드골 집권 시절에 사면돼 양로원에서 임종을 맞으면서 신부에게 고해했지만 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진실은 영원히 어둠에 묻혔다. 프로방스의 여름빛이 밝으면 밝을수록 인간의 마음속은 그만큼 더 깊고 어두워 보인다. 문학과 예술은 이 너무 밝은 빛과 너무 깊은 어둠 사이에 가로놓인 가냘프고 위험하고 아름다운 외나무다리 같다는 생각이 잠시 머리를 스친다.”(213쪽)
김화영은 초년 유학생 시절, 자신의 후견인이 되어준 엑스대학교 프랑스 현대문학과 사무실 책임자인 마담 모롱과도 만난다. 마담 모롱은 김화영을 자신의 네 번째 아들로 삼았고, 그가 올 때마다 자신의 집 2층 방을 내주었다. 지난해에는 김화영 부부와 큰딸 부부, 외손주 둘, 그리고 시부모까지 모두 8명이 찾아간 적도 있다.
청년 김화영이 저명한 불문학자인 레몽 장 교수의 문하생이 되고자 했을 때 레몽 장은 “지도학생이 너무 많아 받아줄 수 없다”면서 마담 모롱에게 예비 과정을 맡겼던 것인데, 모롱은 한동안 김화영의 학습 태도를 지켜본 뒤 이런 추천서를 써주었다고 한다. “교수께서 이 한국 젊은이를 지도하게 된 것은 뜻하지 않은 기회입니다.” 그러고도 40여 년 세월은 흘렀고 마담 모롱은 올해로 구십이다.
“저 앞에 앉아 밤새 사나운 미스트랄 소리를 들으며 이야기꽃을 피우던 그 친구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삶이 우리를 갈라놓고 그 사이로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냈다. 그 길 위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갔다. 올리브가 익고 무화과가 터졌다. 개양귀비꽃들이 핏빛으로 들판을 물들였다. 그리고 세월은 우리 모두의 얼굴을 할퀴며 주름살을 남겼다.”(115쪽)
문학과 예술은 인생과 길항하지 않는다. 예술 따로요, 인생 따로다. 그걸 잘 알고 있는 김화영이기에 그의 머릿속은 여전히 남프랑스의 눈부신 햇빛으로 가득하다. 언어로 지은 성(城) 안의 가장 어두컴컴한 방에서의 햇살이 가장 아름답듯.
정철훈 문학전문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