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몽상의 지도’… 강성은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
입력 2013-07-11 17:21
여기 조금 이상한 시간대를 살아가는 시적 주체가 있다. 무의식에서 생겨난 이 주체는 의식적 주체를 포기하고 다른 시간대로 잠입해 다른 사람이 된 나를 응시하고 기술한다.
“긴 잠에서 깨어난 외할머니가/ 조용히 매실을 담그고 있다/ 긴 잠을 자고 있는 내가 깨어날 때까지// (중략)// 그저 외할머니의 치마 속으로 들어가/ 긴 겨울을 여행하고 싶었을 뿐인데/ 긴 잠에서 깨어난 내가 눈물을 참는 사이/ 밤하늘에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이 내려오고 있다”(‘환상의 빛’ 부분) 이 시에서 진술되고 있는 고백은 꿈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잠재된 ‘나’의 사건을 지칭하지만 시적 주체는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몽상의 언어를 중얼거린다.
강성은(40·사진)의 두 번째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은 이렇듯 잠과 꿈으로 이루어진 아름답고 서늘한 몽상의 지도를 펼쳐 보인다. 꿈속의 또 다른 사건을 적시하고 있는 다음 시를 읽어보자. “누군가 내 얼굴 위에 글자를 쓰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 글자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내 얼굴은 얼마나 넓은지/ 글은 얼마나 긴지/ 나는 앞서간 글자를 잊고/ 밤새 그의 손길을 따라갔다/ 너무 멀리 가서/ 돌아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되었다”(‘동지’ 부분)
동지의 밤은 길다. 긴 글자들이 몸에 새겨질 수 있는 긴 밤이다. 얼마나 긴지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 긴 꿈의 밤이다. 시인은 이 긴 밤의 혼돈 속으로 자신을 망명시키는데, 그가 끊임없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가며 혼돈을 끌어안는 이유는 분리할 수 없는 자신의 모든 세계와 마주서기 위함이다. 그래서 이 잠과 꿈은 자신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한 단지 조금 이상한 여행인 것이다.
“아직 이름이 없고 증상도 없고/ 어떤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멈춰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시 생동하는 세계와 같은// 단지 조금 이상한 병처럼/ 단지 조금 이상한 잠처럼/ (중략)/ 일요일의 낮잠처럼/ 단지 조금 고요한/ 단지 조금 이상한”(‘단지 조금 이상한’ 부분). 잠과 꿈의 빛나는 조각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몽상의 시집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