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어사 출두요”… 순조시대 126일간 행적
입력 2013-07-11 17:00
서수일기/박래겸 지음·조남권 박동욱 옮김/푸른역사
조선 순조 22년(1822). 43세의 홍문관 부교리 박래겸(1780∼1842)은 임금의 봉서를 받고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나간다. 신분 노출을 막는 게 최대 과제다. 수행원 12명을 몇 개 무리로 나눠 움직이도록 한 것도 그런 연유다. 행색은 가급적 추레하게 꾸렸다. 안면이 있는 관리를 만나도 목적지를 둘러댔다. 눈치 빠른 기생에게 들켜 서둘러 자리를 뜰 때도 있었다.
위기의 순간엔 정면 돌파밖에는 방법이 없다. 암행 한 달여 째인 4월 22일. 박래겸은 말과 종을 먼저 떠나보내고 고개에서 쉬고 있었다. 미행하던 군졸들이 갑자기 쇠밧줄을 꺼내 보였다. “여기저기 기찰하니 행동이 수상쩍소.” 체포할 태세였다. “너희들 이 물건이 뭔지 아느냐.” 품에서 마패를 꺼내 들이댔다. 순간, 군졸들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더니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이도 있었다. 당시 가짜 암행어사가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암행어사가 신분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를 아주 희화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래겸이 그해 3월 16일부터 7월 28일까지 126일 동안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활동하면서 기록한 ‘서수(西繡)일기’가 처음 번역됐다.
일기에는 사극에서 자주 보던 암행어사 출두 장면도 8회에 걸쳐 나온다. 5월 13일의 기록은 실감 있다. 마침 수령이 유람을 나가 부재중이었다. “어사 출두요!” 역졸들이 문루에서 외치니 “사람들이 두려워 마치 바람이 불어 우박이 이리저리 흩어지는 것 같았다”고 일기는 적는다.
암행어사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컸던지 할머니가 “암행어사다!”라고 하면 우는 손자도 울음을 뚝 그치더라는 기록도 있다.
암행어사의 길은 의외로 고생스러웠다. 126일간 4915리(里)를 이동했다. 1리를 400m로 계산하면 2000㎞ 정도를 이동한 것. 경부고속도로 길이(417㎞)의 5배에 이르는 거리다. 하루 평균 16㎞ 정도를 걷거나 말을 타고 이동한 셈이다. 암행어사 임무 수행 도중 과로로 순직한 사례가 있었다는 게 수긍이 간다.
그런 고생과 위세에 비해 일기에 나타난 조사방식이나 태도는 그리 엄정해 보이지 않는다. 피검자인 고을 수령과 배를 타고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기도 하고, 조사기간 수령이 바친 기생과 잠자리를 같이 하는 장면도 나온다. 감동뿐 아니라 실망까지 주는 암행어사의 진면목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는 게 서수일기의 매력이다.
호조참판과 예조참판까지 올랐던 박래겸은 49세 때 함경도 북평사 때의 공무를 기록한 ‘북막일기’, 50세에 서장관으로 중국 심양을 다녀온 견문기 ‘심사일기’도 남겼다.
손영옥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