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14) 아버지, 서울 수복되던 날 공산군 총탄에 순교

입력 2013-07-09 17:04


나는 황 고모와 무작정 함께 걸어서 애양원으로 향했다. 발이 부르트고 입술이 벗겨졌지만 더 힘든 것은 끓어오르는 가슴 속 울분과 분노였다.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회한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길을 걸었다. 트럭이건 지프건 우마차건 닥치는 대로 얻어 타면서 겨우 애양원에 도착했다.

아버지는 1950년 9월 13일 공산 치하의 여수내무서 율촌분주소에 잡혀가 서울이 수복되던 날인 28일에 여수 미평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순교했다. 당시 48세였다.

호남 지역까지 인민군에 함락되자 주변 사람들은 아버지에게 피난을 권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애양원 식구에게 어느 때보다 지켜줄 사람이 필요할 때 어찌 나 몰라라 팽개치고 달아날 수 있겠소”라며 남았다고 한다. 안모 군도 아버지를 찾아와 “아버지, 이대로 있으면 죽는 건 뻔한 일입니다. 어서 저와 함께 피신해요”라며 애원했지만 일제도 꺾지 못했던 아버지의 고집을 당하진 못했다.

여수가 함락되자 군사반란 사건 당시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던 좌익 인사들이 다시 내려왔다. 반란 당시와 같은 흉흉한 일들이 속출했다.

아버지는 애양원에서 하루 세 번씩 종을 치며 부흥집회를 열었다. 나환자들과 함께 손뼉 치며 찬송가를 부르고 “첫째도 순교, 둘째도 순교, 셋째도 순교입니다. 순교를 각오합시다. 때가 왔으니 잘 살려고 노력 말고 잘 죽기를 기도합시다”라고 설교했다고 한다. 이것은 아버지가 평소에도 늘 하시던 말씀이었다. 대신 공산당이나 좌익을 거론하지는 않으셨다.

마침내 집에 들이닥친 이들에게 끌려갈 때에도 아버지는 양복을 차려 입고 교회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여수 감방에서 보름 동안 갇혀 지내다 9월 28일이 되었다.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면서 순천의 인민군도 철수하게 되었다. 감방에 있던 이들까지 끌고 갔다. 인민군은 여수를 조금 벗어난 미평 지서 앞에서 10명씩 나누어 총살을 시켰다.

그곳에 같이 있었던 오빠의 친구 김창수씨에 따르면, 아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민군과 감방 동료들에게 예수를 영접하라고 전도를 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창수씨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이랬다. “창수군, 기도하게. 어떤 순간에도 기도를 잊지 말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것이네. 자, 우리는 천국에서 만나세.” 창수 오빠는 마지막에 끌려가던 순간 포승을 간신히 풀고 도망쳐 살아남았다. 그 길로 애양원으로 달려와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일제에 해방되어 감옥에서 석방될 때 걸어왔던 그 둑길을 따라 돌아왔다. 이번에는 남자 네 명이 든 들것에 실려 누운 채였다. 온 애양원 나환자들이 땅을 치며 울기 시작했다. 애양원 뜰 한복판에 놓인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이제 이곳은 걱정하지 말고 눈을 감고 가시오” 하며 아버지의 눈을 감겨드렸다. 안군은 장례식 내내 두건을 쓰고 삼베 옷을 입고 맏상주 노릇을 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손양원 목사는 성자라고. 위대한 순교자라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보통의 아버지였다면 우리 가정은 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극심한 불면증과 헛것에 시달렸다. 귓전에는 총소리가 맴돌았고, 길을 걸을 때면 어디에선가 총알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길모퉁이를 돌 때면 맞은편에 빨치산이 숨어있을 것 같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원망했다. 방황했다. “하나님!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지게 내버려두십니까. 왜 하나님을 믿고 따르겠노라 하는 오빠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만 먼저 데려가십니까. 나도 데려가 주시오. 더 이상 이 땅에 살 수가 없소.”

안군도 그랬던 것 같다. 아버지의 배려로 부산 고려고등성경학교에 진학한 안군은 주일마다 부산역과 시장을 돌아다니며 노방전도를 할 정도로 신앙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언젠가부터 그도 심각한 회의에 빠졌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