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송동희 (13) 교문에 걸린 ‘붉은 깃발’ 보기만해도 섬뜩
입력 2013-07-08 17:26 수정 2013-07-08 20:02
그런 이유로 나는 얼마 동안 안군의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의 권유를 거역하지 못해 그런 것이지만, 내 심정은 괴롭기만 했다.
안군은 그 집에 있을 때가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그의 신앙을 키우고자 집회마다 데려갔다. 오며 가며 친아버지처럼 사랑을 베풀고 감싸주었다. 하지만 곧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힐끗힐끗 거렸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 무슨 동물원의 원숭이 구경하듯 안군 곁에 몰려들었다. 그가 몸을 피해도 사람들은 쫓아갔다. 아버지도 민망한 노릇이라며 더 이상 데리고 다니진 않았다. 아버지는 취직자리까지 알아보러 다닐 정도로 그를 아꼈다.
아버지는 어쩜 그렇게 안군을 사랑할 수 있었을까.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월이 지나고 나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행적이 눈 위의 발자국처럼 내 마음에 새겨졌다.
어쨌든 나는 두 오빠의 핏자국이 있던 집에서는 무서워 살 수가 없었고, 학교는 다녀야 했기에 안군 없는 그 집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집에 있는 것 자체가 지옥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날이 갈수록 내 몸은 말라가고 정신도 쇠약해졌다. 어쩌다 안군이 집에 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고개를 돌려버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그도 마음이 편지 않았을 것이다.
나날이 야위어가는 나를 더 두고 볼 수 없었던 부모님은 서울 이화여중으로 전학시켰다. 일제시대 말기에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던 황덕순 고모와 함께 작은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했다. 나병은 있었지만 병표가 없었던 황 고모는 총신대에서 신학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나는 3학년이 되었다. 그해 6월 북한이 전쟁을 시작했다. 이 민족의 불행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고, 우리 가족의 불행 역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해방이라는 큰 선물을 주셨는데, 무엇이 모자라 형제간에 총부리를 들이대야 했을까.
황 고모와 나는 미처 피난을 가지 못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린 지 사흘 뒤에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 다리를 폭파시켜버렸다. 학교 교문에는 붉은 깃발이 걸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섬뜩했다. 두 오빠의 뒤를 이어, 이번엔 내 차례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나와 황 고모는 절대로 떨어지지 말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고 맹세했다.
자취방에 들어가기도 무서웠다. 두 오빠들처럼, 언제 누가 트럭을 타고 와 우리를 데려갈지 몰랐다.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는 많은 목회자 가족들이 남아 있었다. 전쟁 나기 하루 전인 6월 24일 밤 서울에 거주하는 목사님들 중 상당수가 어딘가로 끌려갔다. 남은 가족은 돌아올 줄 모르는 목사님들을 기다리다 피난도 가지 못한 것이다. 황 고모와 나는 땅굴 속에 숨기도 하고 다른 교인들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우리를 살려달라고, 이 나라를 살려달라고. 잘 때도 신발을 벗지 못했다. 봇짐을 베개로 사용했다. 잠결에 누군가가 “뛰어라!”라고 소리치면 영문도 모른 채 죽어라 도망을 치곤 했다.
세상은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재만 남은 거리엔 부서진 건물, 널려 있는 시체, 부모를 잃고 우는 아이들이 있었다. 이대로 전쟁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석 달 뒤인 9월 28일 국군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날은 하늘이 참 맑았다. 비로소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있었다.
전쟁 전날 사라진 목사님들은 북으로 끌려갔다는 소문도 있고, 구덩이에 처넣고 생매장시켰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끔찍했다. 순천은 남쪽 끝이니 아무 일 없겠지 싶으면서도 불안을 떨치기 힘들었다. 어느 날 안용준 목사님이 우리 자취방에 오셨다. 목사님은 나를 보시더니 말을 못하시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 표정을 보는 내 가슴이 쿵하고 무너지는 것 같았다.
“동희야. 네 아버님마저 끝내….”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