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이옥희 인도 선교사] 키쇼르의 선물

입력 2013-07-07 17:39 수정 2013-07-07 15:38


한 번도 행복한 적 없던 그 아이… 고통 속에 떠났지만 한국 후원자 잇는 다리가 됐다

키쇼르는 내 가슴에 떠 있는 슬픈 별이다. 그 아이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났지만 그 눈동자와 이름은 여전히 살아서 나를 울린다.

키쇼르는 인도 안드라푸라데쉬 주 데칸고원에 위치한 오지마을 압둘라뿌람에 살던 소년이다. 그의 아버지는 외다리 장애인이고 어머니는 마을의 여느 사람들처럼 돌 깨는 석수였다. 나는 압둘라뿌람의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나무그늘 아래 외롭게 앉아있는, 눈이 큰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나를 둘러싼 수십명의 아이들 때문에 그 아이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10살이고 백혈병에 영양실조가 겹쳐 위독하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서둘러 마을을 방문했고 그날 역시 나무그늘 아래 혼자 앉아있는 그를 발견했다. 안타깝고 슬픈 마음에 두 팔로 번쩍 안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종잇장처럼 가벼운 그의 몸이 떨고 있었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뇌리에 스치며 10살 소년이 그동안 홀로 겪었을 질병의 고통, 굶주림의 고통, 외로움의 고통이 심장에 꽂혔다.

가혹한 고통을 함께 나누지 못하는 세상을 대신해 용서를 빌며 서둘러 마을을 다시 방문했는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요동치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키쇼르 어딨니?” 내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나무그늘 아래 모인 아이들 모두가 하늘을 가리켰다. 나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키쇼르 어딨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슬픔을 견딜 수 없어 무리에서 빠져나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하나님, 너무 가혹해요. 그 아이가 무슨 죄를 졌기에 그 고통을 다 겪어야 했나요. 한 번도 건강한 적이 없고, 한 번도 마음껏 먹어본 적이 없고, 한 번도 행복한 적이 없고, 한 번도 위로받은 적이 없었던 아이를 그렇게 빨리 데려가시다니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별 무리 속에서 키쇼르의 얼굴이 보였고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 “세상에는 키쇼르가 많다. 키쇼르를 돌보아라. 키쇼르를 돌보아라. 키쇼르를 돌보아라.”

키쇼르는 외롭고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함께 사는 세상을 지향하는 비전아시아미션과 기장 총회의 자매결연 프로젝트를 낳았다. 키쇼르는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 2006년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아이들을 한국 교우들과 연결시켜 최소한의 의식주가 가능하도록 돕고, ‘세상은 살만한 곳이며, 모두의 인생이 가치 있고 아름다운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7년간 90여명의 아동들과 주님의 사랑을 나눴다. 지금은 60여명의 아동을 섬기고 있다. 우리가 섬기는 아이들 가운데에는 에이즈 피해 아동 50여명도 있다. 그들이 바로 세미한 음성으로 들었던 제2, 제3의 키쇼르다.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님으로부터 수직 감염됐고 대부분 고아다.

현재 인도에는 에이즈 피해 아동으로 등록된 아이들이 50만명이고 어른은 250만명이다. 등록되지 않은 사람은 더 많다고 한다. 에이즈 피해 아동들을 섬기게 된 것은 데칸고원의 캠벨병원을 방문할 때마다 사망한 에이즈 환자의 자녀들이 고아가 돼 돌아갈 곳이 없다는 소식을 자주 접했기 때문이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 3∼4명이 몰려다니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에이즈 환자 병동에 입원한 많은 환자들을 틈나는 대로 방문하는 중에 그들의 아픔과 고뇌를 알게 됐다. 하지만 섣불리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캠벨병원 원장인 헬렌 박사에게 에이즈 환자들과 모임을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노동에서 제외되는 것, 마을과 가족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것, 굶주리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하루 한 끼 식사’라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울었고, 서로 위로하며 굶주림의 걱정 없이 치료에 전념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좋지 않아 어른들을 위한 모금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지만 죄 없는 에이즈 피해 아동들에 대해서는 전주 지역 한 집사님의 도움으로 2009년 7월 20명 정도가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집을 완성했다.

아무 대책 없이 20명의 아동을 보살피기로 했고 그들을 위해 4명의 직원을 세웠다. 생활비와 인건비 지급을 위해 기도하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20여명의 한국 교우님들이 우리 아동들과 자매결연을 맺어줬다. 현재 자매결연으로 운영되고 있는 2개의 에이즈 피해 아동들의 집에서 50여명의 아이들이 보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은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자신들을 위해 기도하며 후원한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늘 기도하고 있다.

톨라씨(13)는 에이즈로 부모를 다 잃은 고아 소녀다. 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아래 편지는 그가 11세 때 쓴 짤막한 편지로 처절한 외로움이 담겨 있다. “엄마, 함께 있고 싶어요. 엄마라고 부를 때 대답해 주세요. 엄마 손으로 먹여주는 밥이 먹고 싶어요.”

뽀남빨리마을 출신인 벵까따 라마나(15)는 어느 날 기숙학교에서 돌아왔더니 집에 아무도 없어 부모를 찾으러 나갔다가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때 충격으로 정신을 잃은 아이를 마을 사람들이 우리 홈에 데려왔다. 그가 쓴 편지는 몸부림이다. “하나님, 이 지긋지긋한 병마로부터 저를 구원해주세요. 어디를 가든지 저를 괴롭히는 이 병으로부터 저를 고쳐주세요. 병을 생각하면 두렵고 겁나요.”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는 아픔과 수치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어 이유 있는 반항과 불만,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인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 것이다. ‘왜 나는 홀로, 그것도 에이즈 환자로 살아야 하는가?’ ‘고아로서 세상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고통스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등등의 질문을 하며 그들은 한없이 불안하고 외롭고 슬픈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언젠가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일이 눈앞에 닥치니 너무 당혹스러웠다.

해결의 묘책은 없지만 실현 가능한 세 가지 대안을 세웠다. 일기를 쓰게 하는 것과 인도 전통악기를 배우게 하는 것, 그리고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의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들의 방황과 반항이 가능하면 빨리 끝나길 바라면서 작년 봄부터 함께 일기장을 읽으며 눈높이를 그들에게 맞추고, 아이들의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해 매달 또는 매학기 성적표를 확인하고 상을 주기로 했다.

우리는 이 아동들을 위해 두 가지 제목을 놓고 기도하고 있다. 하나는 10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중단하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직업훈련원을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남녀 분리를 위해 새로운 집을 짓는 것이다. 비록 방은 다르지만 같은 거실을 사용하며 여성으로서 안정감과 사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불편한 상황을 감내하는 여아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리 딸들이 안심하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속히 주어지길 꿈꾸며 기도한다.

이옥희 선교사

● 이옥희 선교사

-1956년, 전북 이리여고·한신대·한신대 신대원 졸업, 1991년 목사 안수

-기장 총회·전서노회 1997년 파송

-기장 총회 파송 남인도교단 선교사(현)

-비전아시아미션 파송 인도선교사(현)

-인도독립교단 실맛신학교 한국 협력 책임자(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