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12) “목사님, 이 자가 지금 막 동인 동신이를 죽였다고 시인했습니다.”

입력 2013-07-07 17:19


“목사님, 이 자가 지금 막 동인 동신이를 죽였다고 시인했습니다.”

“나는 동인 동신이 아버지 손양원 목사에게서 부탁을 받고 왔소. 그 학생을 처형하지 말고 살려주면 회개시켜 아들 삼겠다고 했소.”

사람들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대부분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오히려 한 군인은 “그런 말 하시면 목사님도 빨갱이라고 오해 받습니다”라며 아예 입을 다물라고 했다.

나 목사님은 사흘 동안 경찰서와 군청을 찾아다니면서 아버지의 뜻을 전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나는 나 목사님 댁에 머물며 상황을 전해들었다. 나는 무엇 때문인지 초초하고 불안했다. 사흘쯤 지났을 때 목사님이 다급히 집으로 들어오시며 나를 불렀다. “동희야. 도저히 안 되겠다. 지금 나와 같이 팔왕 카페로 가자.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팔왕 카페라는 술집에 죄수들이 모여 사형장으로 갈 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아무리 설득해도 말이 안 통하니 나를 급히 부르러 오신 것이다. 목사님 집에서는 5분 거리였다.

“동희야. 거기 가서 딴소리 하면 안 된다. 꼭 아버님이 시킨 대로 말해야 한다.” 내 기색을 눈치채셨던 것인지 나 목사님은 당부를 했다. 내 가슴은 방망이질을 하듯 뛰기 시작했다.

‘이놈을 죽일까, 살릴까, 죽일까, 살릴까.’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마음이 바뀌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팔왕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십개의 눈이 모두 나와 목사님을 바라보았다. 대령 계급장을 단 군인이 내 이름을 묻더니 물었다. “그래, 아버지가 뭐라고 하셔서 여기까지 왔느냐.”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단숨에 토하듯 말을 뱉었다. “두 오빠를 죽인 자를 잡았거든 매 한대도 때리지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하셨어요. 그를 구해 아들 삼겠다고요. 성경 말씀에 원수를 사랑하라 했기 때문이래요.”

숨을 참아가며 겨우 말을 마쳤다. 주르륵, 눈물이 내 뺨 위로 흘러내렸다. 나는 옆에 있던 책상에 엎드려 울었다. 사방이 조용해졌다. 잠시 뒤 대령이 나직이 하는 말이 들렸다. “위대하시다.”

교실 크기만한 방 안에 조금씩 흐느낌이 들리더니 울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나 목사님도, 살기등등했던 우익 학생들도, 죽음을 기다리던 좌익 학생들도, 군인들도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고 있었다. 아직 철부지, 신앙의 깊은 경지를 깨닫기엔 부족했던 나였지만 이 광경도 오늘까지 내 눈 앞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양식이 없어 기근이 아니라 사랑이 없어 기근이라고 한다. 복수만이 최대의 승리인 양 끝장을 보자는 오늘의 우리 사회에도 아버지가 던진 이 사랑의 폭탄이 던져질 수는 없을까. 용서를 모르는 완악한 인간사회에 죄악으로 뭉친 근원을 뿌리째 파괴하는 복음의 원자탄을 투하할 수는 없을까.

며칠 뒤 집회를 마치고 돌아온 아버지는 안군의 집을 찾아갔다. “너로구나. 이리 오너라.” 아버지는 따뜻하게 이름을 부르며 안군의 손을 꼭 잡았다. “안심하거라. 네 실수는 벌써 용서했다. 기억도 하지 않겠다. 하나님도 용서했을 줄 믿는다.”

안군의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제가 사실 일제시대에 경제범으로 광주형무소에 구금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해 들어왔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다들 존경하는 마음이었지요. 어떤 분인지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안군의 손을 잡고 “예수 잘 믿고, 내 두 아들 몫을 다해 주님의 일꾼이 되어다오”라고 당부했다. 떠나려는 아버지를 붙잡고 안군의 아버지가 부탁했다.

“목사님, 큰따님이 순천 매산여중을 다닌다면서요. 따님이 저희 집에서 학교를 다니면 어떨는지요. 우리 가족이 예수 믿는 데도 도움이 되겠고, 목사님도 더 가까이 뵐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