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세상 한 가운데로
입력 2013-07-07 17:17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시인 도연명(陶淵明)은 일찍이 관직에 몸을 담았다가 불혹의 나이에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둔하며 청경우독(晴耕雨讀)의 삶을 살았다. 평생 가난했지만,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며 그는 실로 행복을 누렸다고 한다. 최근 나는 중년을 넘긴 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 주위에는 도연명과 같은 삶의 방식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느꼈다. 그이 역시 도연명과 같은 삶을 살고자 마흔을 넘긴 나이에 모든 것을 접고 시골로 내려갔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의 도시인들 마음속에는 비슷한 로망이 있는 것 같다. 바쁜 일상과 스트레스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사는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쯤 이러한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랴.
그러나 ‘도연명 식의 삶이 과연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행복의 분깃인가’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우리를 세상 한가운데로 보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마치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냄과 같다.’ 언젠가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하는데, 큰 개가 무섭게 달려들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한손으로 강아지를 안고 달려드는 개를 힘껏 걷어찼다.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본능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능에도 어울리지 않는 명령을 하셨다. 왜? 그것이 주의 강한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시돈으로 보내셨다. 시돈은 엘리야의 생명을 노리는 바알숭배자들의 홈그라운드다. 엘리야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바알 신앙의 선교사 이세벨의 고향이다.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을 향한 적성(敵性) 국가와 같은 이 세상 한 중심에 우리를 두기를 원하셨다.
왜일까? 적의 심장부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엘리야와 똑같은 임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이 세상을 이기고 압도해야 할 임무를 우리는 가졌기 때문이다. 평안과 기쁨의 복음 진리는 무릉도원에서 증명될 것이 아니라,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증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두아르도 베라스테기라는 멕시코 출신의 배우가 있다. 가수로 성공하고, 배우로도 성공한 그는 미국 진출을 위해 영어교사를 만난다. 마음의 불안으로 방황하던 어느 날, 그는 영어교사에게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그 후 그는 모든 삶을 청산하고 아마존 정글의 선교사로 헌신을 한다. 그런데 어느 날 그의 담임목사가 그에게 도전하기를 ‘형제여, 당신의 정글은 아마존이 아니요. 당신의 정글은 할리우드입니다.’ 그 말에 충격을 받고, 그는 낙태반대 메시지를 담은 영화 ‘벨라’를 완성한다. 이 영화로 인해 삶이 변했다는 수많은 편지, 특히 ‘낙태를 결심했다가 포기했노라’는 수많은 간증이 쏟아져 나왔다. 하나님나라는 미래에 완성되지만, 바로 지금 여기서 나타나야 한다. 본능에 어울리지 않지만, 양은 이리떼 가운데로 가야 한다. 동성애 합법화가 이루어진 미국을 보며 밀려온 생각이다.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