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도 칼럼] 죽더라도 아니 잊을 것입니다
입력 2013-07-05 18:21 수정 2013-07-05 19:24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41주년이 됐습니다. 남북 간 대화와 한반도 평화 추진의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발표한 남북 간 첫 합의 문서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국민의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 간 회담을 통한 합의라는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평화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꼭 한 주 후였습니다. 선친(고 최희화)과 함께 싸우셨던 동료들과 부하대원들이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통곡하시던 그 날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거저, 평화통일이 이루어져서 우리는 고향에 갈 것인데, 우리 최 대장님은 이 소식도 못 듣고 황망히 가시다니….”
아버지는 서해 유격부대였던 8240부대 동키4부대 부부대장이셨습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기 한 해 전, 71년 7월 10일 갑작스럽게 하늘의 부름을 받고 그토록 가보고 싶어 하시던 고향, 황해도 장산곶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시고 떠나셨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 월내도와 오작도 등에 주둔해 있던 아버지와 동료 부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우리 땅을 사수하겠노라고 다짐하던 늠름한 모습이 다시 제 마음을 울립니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손원일 제독이 섬으로 찾아가 아버지를 포함한 부대장들을 모아놓고 눈물로 설득하셨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백령도보다도 더 북쪽에 있는 서해 16개 섬을 이미 다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전 후 이분들을 설득하고 이동시키기 위해서 모두가 눈물겨운 날들을 섬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포함한 용사들은 손에 닿을 듯한 고향땅을 바라보면서 유엔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16개 섬을 놔두고 떠나오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처절한 심정이었을까요.
이분들이 저희 집에 모여서 아버지와 함께 지난 과거를 회상하실 때 “피눈물을 흘리며 내려왔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어린 저도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잘 전달이 되고 공감이 됩니다.
신문 보도에는 유엔군이 점령하고 있었다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8240부대가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8240부대는 유엔군 소속 특수부대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유엔군이라고 하면 한국전에 참여한 16개 우방국의 참전용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8240부대는 전원이 이북 출신의 용맹한 무명용사들, 바로 군번 없는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때 그분들의 얼굴은 점점 잊혀져 갑니다. 하지만 제 가슴에 남아있는 그분들의 눈빛과 결연한 각오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며, 다음 세대에도 반드시 전할 것입니다.
이 사실만은 현재 NLL(북방한계선)을 두고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보이는 여야의 모든 정치인들이 분명히 해두고 가야 할 대목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각자 처해있는 입장과 주장, 이념을 넘어서서 이 시점에 하나님과 역사 앞에 진정으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대한민국의 자유와 번영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어떤 보상과 대가 없이 조국을 지켜온 이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분들의 정신과 희생을 오늘의 정치 지도자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더욱 더 모범을 보이고 계승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오직 자유수호와 평등사회를 위해서 목숨을 내던진 애국선열과 무명용사들의 희생정신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깨닫고 실천하는 지도자들이 되길 두 손 모아 기도합니다. 저는 죽을 때까지 이 사실을 잊지 않겠습니다. 죽더라도 아니 잊을 것입니다. (다일공동체 대표)
◇최일도 목사 약력=1957년 서울 출생. 장신대신대원 졸, 다일천사병원 이사장, 한국시인협회 정회원. 저서로는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