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희망지기-이종만] “예수님의 오병이어, 배고픈 이의 현실을 지나치지 않은 그 뜻을 따르렵니다”

입력 2013-07-05 18:11 수정 2013-07-05 19:54

장애인 등 79명과 공동체 꾸린 유은복지재단 원장 이종만 목사

“우리는 새싹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길러요. 재배 기계에 의존하지 않고 손으로 직접 기르다보니 품질 면에서도 우수하고요. 오죽하면 우리 가족들이 출근하면서 ‘새싹이 보고 싶어 빨리 왔다’고 하겠어요. 당연히 다른 곳보다 품질이 월등할 수밖에 없지요.”

새싹과 어린잎 채소의 재배과정을 설명하는 김현숙(54) 사모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넘쳤다. 이는 그와 함께 공동체를 이끄는 유은복지재단 원장 이종만(57) 목사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달 27일 경북 안동시 남선면 유은복지재단에서 만난 이들 부부는 만나자마자 기자를 재단 옆 장애인직업재활시설인 나눔공동체 작업장으로 인도했다.

작업장 안에는 위생 복장을 갖춘 직원들이 새싹을 씻거나 포장하고 있었다. 분주히 일하는 이들의 모습에서 외관상 장애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간간이 사용하는 수화를 보고서야 이들 가운데 청각장애인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부분의 일을 수작업으로 처리하는 이들은 힘들긴 하지만 일할 수 있어 즐겁고 보람차다고 했다.

“일반인처럼 장애인이 서로 도와가며 일할 수 있어 좋아요. 반장 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이곳에서 10여년간 일할 수 있던 건 목사님 내외 덕이 큽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처럼 잘 챙겨주셨거든요.”

뇌병변 장애가 있는 작업반장 정미곤(39·여)씨가 새싹을 포장하던 일손을 멈추고 천천히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이 목사 부부는 청각·지적·정서장애와 고령자, 북한이탈주민 등이 포함된 79명의 공동체 구성원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가족처럼 대한다.

“이곳 작업은 단순해요. 기계를 쓰면 사람이 이만큼 필요 없지요. 야간작업도 없어요. 늦어도 5시30분엔 끝납니다. 고용창출을 목적으로 하니 가능한 일이죠. 그럼에도 매출이 오르고 기업이 날로 발전했어요. 한마디로 기적이죠. 아마 하나님께서 장애인을 매우 사랑해서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복음은 ‘세상을 바꾸는 다이너마이트’

이 목사의 원래 꿈은 법조인이었다. 10대 시절 사회를 냉소적으로 바라봤던 그는 법조인이 돼 세상의 불공평을 바로잡고 싶었다.

홀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던 이 목사를 교회로 인도한 건 고3때 그의 친구였다. 친구 손에 이끌려 1976년 안동서부교회에 등록한 그는 이곳에서 해답의 실마리를 찾는다.

“교회에 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복음이 이 사회를 바꿀 ‘다이너마이트’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폭발적인 힘을 복음에서 발견했거든요.”

교회 내 농아부 예배에서 처음 농아인을 만난 그는 이들을 도우며 수화를 배웠다. 81년부터는 평신도로 강단에서 설교하는 농아부 전도인으로 활동했다. 목회자 가운데 수화를 사용해 농아인에게 신앙을 지도할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교 졸업 후 사법시험을 준비하며 전도인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이 목사는 그의 인생을 바꾼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다. 그가 지도하던 교회학교 농아부 학생이 가난과 장애 때문에 목숨을 잃은 일이었다.

“교회 농아부에서 제가 돌보던 초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가 겨울방학이 끝났는데도 학교와 교회에 오지 않았습니다. 걱정이 돼 심방을 갔는데 정말 사람 살 곳이 못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더군요. 조부모부터 부모 형제 모두 농아인이라 집 돌볼 사람이 없던 겁니다. 허름한 이불 위에 누워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비참했습니다. 친구와 놀다 목이 다쳐 움직이기 힘들다는 아이를 데리고 급히 병원에 갔습니다. 의사는 오른팔이 마비됐고 2·3번 목뼈가 골절됐는데 이 상태로 수술하면 하반신 마비의 위험이 있다며 가망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더군요. 돈이 없어 목에 파스만 붙이다가 처음 병원에 갔는데 이런 진단이 나온 겁니다. 집에 아이를 데려다 주면서 수화로 말했지요. ‘하나님이 널 많이 사랑하셔. 우리 하나님 나라에서 만나자. 알겠지?’”

결국 아이는 20여일 뒤 숨졌다. 이 목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을 원망했다.

“하나님께 어떻게 이러실 수 있냐고 따져 물었죠. 장애인도 하나님의 자녀고 사람인데 이렇게 비참한 삶을 허락하시다뇨. 하나님뿐 아니라 정부와 사회, 교회까지 모두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때 문득 제 마음속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불공평이 사라지지 않는 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이를 위해 자기 삶을 내던질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다.’ 돌이켜보니 전 문제제기만 한 사람이더군요. 이때 결심했습니다. 목회자로서 이들의 삶을 책임지겠다고요.”

옷 팔러 다니는 장돌뱅이 목사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이 목사는 뒤늦게 신학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30세이던 86년 대구의 계명대 기독교학과에 입학했고 뒤이어 90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신학생 시절에도 이 목사는 농아인 선교에 전념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들의 일자리 주선에 앞장섰다. 말씀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복음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농아인 성도를 적잖게 봐와서다. 삶이 빠진 신앙 지도에 한계를 느낀 그는 교회 농아부에서 만나 87년 결혼한 아내 김씨와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 공단에 교회 농아부 학생을 데리고 다니며 취업을 알선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할 때 성경을 독특하게 바라본 것 같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이 오병이어 말씀에서 예수님의 이적과 능력에 초점을 맞출 때 전 제자와 모인 무리의 배고픔을 간과하지 않은 예수의 모습에 집중했거든요. 이 말씀으로 ‘사람이 말씀으로 사는 게 옳다만 예수님께서는 당장 배고픈 현실도 절대 지나치는 분이 아니구나’란 걸 깨달았습니다. 당시 제자와 무리들이 느낀 배고픔처럼 직장은 장애인의 삶에 있어 가장 절실한 문제거든요.”

하지만 이들의 어려움은 취업에서 그치지 않았다. 직장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해 폭행사건에 연루되는 경우도 있었고 고용주나 동료로부터 금전적·성적 착취를 당하는 일도 생겼다. 또 타지생활에서의 외로움으로 동거를 하다 자녀를 낳은 경우 아이가 말을 못 배운 채 그대로 방치되거나 곁을 지나는 차 소리를 못 듣고 교통사고를 당하는 비극적인 일들이 적지 않게 생겼다.

“가슴 아픈 일이 얼마나 많았던지, 일일이 설명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한 농아인은 소리를 못 들어 알루미늄 새시공장에서 오른손 손가락이 절단됐어요. 수화를 사용했으니까 평생 말을 제대로 못하게 된 거죠. 또 몇몇 여성 농아인은 야간근무를 서다 동료들에게 여러 번 몹쓸 짓을 당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취업 후 타지생활 하는 장애인 가운데 몸도 잃고 신앙도 잃는 일이 다반사였어요. 당시 안동엔 장애인 일자리가 많지 않았기에 타지로 취업을 안 하면 일을 하기 힘들었어요. 뭔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무엇보다 장애인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공동체가 시급하다고 본 이 목사는 94년 안동에 재활사업장인 나눔공동체를 설립했다. 13년간 초등학교 특수교사를 하던 아내의 퇴직금과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인연을 맺은 고 김인수 고려대 교수의 지원금을 사업 밑천으로 삼은 그는 나눔공동체의 첫 사업으로 봉제업을 택했다.

“나눔공동체 설립 1년 전 이랜드 복지재단에서 봉제 일감을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기에 고민 없이 봉제공장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손으로 소통하는 농아인에게 잘 맞지 않더라고요. 저와 아내를 비롯해 모든 공동체 가족들이 밤 11시까지 일해도 목표를 못 채우는 달이 부지기수였지요. 수익이 없어도 매달 월급은 줘야 하니까 이곳저곳에 손을 벌렸습니다. 형제들에게 돈 빌리고 친척에게 보증 서 달라고 부탁하니 다들 그러더군요. ‘이 목사, 자네 정신 나갔나. 왜 그렇게 별나게 목회하나?’”

주변의 염려에도 이 목사는 사업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의 손에 장애인 수십 명의 생계가 달렸기 때문이다. 이 목사 부부는 직원 월급 마련을 위해 주말에 동료 목회자 교회나 서울 청계천에 가 옷을 팔았다.

이 목사가 어렵게 이끌던 봉제공장은 97년 외환위기로 결정타를 맞는다. 하루아침에 일감의 3분의 2가 줄었고 순식간에 3억여원의 빚이 생겼다. 86명이던 공동체 인원도 유지할 능력이 없어 절반으로 줄였다.

“98년쯤 되니 도저히 못 견디겠더라고요. 모든 걸 접고 친구가 있는 이탈리아로 떠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떠나려 하니 그간 해온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더군요. ‘안동에서 한 목사가 장애인과 사업한다고 하더니 결국 도망갔다’는 소리만은 정말 듣기 싫었어요. 고향에서 해온 말과 행동이 있는데, 도망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그는 다시 재봉틀을 잡고 지친 공동체 일원을 독려하며 계속 공장을 가동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99년부터 일감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 국내 봉제공장이 대부분 문을 닫은 탓에 급하게 물량을 처리할 곳이 없자 여러 기업에서 그의 공장에 일감을 보내온 것이었다.

점차 바빠진 이 목사는 97년 떠나보낸 직원을 다시 불렀고 2000년엔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빚더미에 올랐던 나눔공동체는 2001년 모든 빚을 청산했고 2004년 새싹 재배 사업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장애인은 없다, 다만 인간이 있을 뿐

그가 사업 아이템을 바꾼 이유는 장애인과 노약자에게 새싹 사업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해서다. 위생적인 환경에서 자라는 일본 새싹 작업장을 본 이 목사는 30여명의 공동체원과 함께 봉제사업을 접고 새싹 재배를 시작했다. 초반엔 재배 기술도 서툴고 판로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국내에 웰빙 바람이 불면서 나눔공동체의 사업은 순풍을 탔다. 2010년 흑자로 전환된 새싹 사업은 지난해 23억3000여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호텔신라 조선비치 등 유명 호텔과 전국의 유명 일식집에 납품을 많이 했다.

이 목사는 2002년 사회복지법인인 유은복지재단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없어도 장애인 자립을 위한 사업은 지속돼야 한다는 생각에 공익 법인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금 우리 공동체에 속한 79명은 모두 이곳으로 통근해요. 장애가 있어도 보통 사람처럼 삽니다. 가족과 함께 살면서 세금 내고, 돈 모아 집 장만하고 결혼도 합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살거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돕는 장애인도 많고요. 이를 볼 때마다 정말 보람을 느껴요. 장애인 자립을 돕느라 우리 자녀를 두지 않았지만 괜찮습니다. 장성해 독립한 이곳의 모든 이들이 제 자녀고 가족이니까요.”

앞으로 더 많은 장애인이 자립할 수 있도록 작업장을 확장할 계획이라는 이 목사는 한국교회가 장애인을 보호 대상이 아닌 하나님이 지은 존엄한 자녀로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인은 보호받아야 할 어린이도 아니고 치료받아야 할 환자도 아니며, 숭배 받아야 할 신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처럼 한 인간일 뿐이죠. 독일의 유명한 소망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땅에 장애인은 단 한명도 없다. 있다면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라고요. 앞으로 이들을 하나님이 지은 존엄한 자녀이자 독립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한국교회가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안동=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