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조수표 요지경] 기막힌 위폐! 기가찬 은행!
입력 2013-07-06 04:04
“저희가 입수한 첩보로는 한 800억원 됩니다. 실제로 얼마나 유통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요.” 곽정기 경기경찰청 수사과장이 밝힌 위조수표 액수다. 위조수표가 실제 돌고 있는지 아니면 범인들 손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KB국민은행의 베테랑 직원을 완벽히 속여 넘긴 한국판 ‘슈퍼노트’(진짜 지폐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정밀하게 만들어진 100달러 위조지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데자뷰
국내 모든 전문가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완벽한 위조수표가 세상에 등장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위조방식, 일련번호 획득과정, 위조방지 장치를 피해가는 방법까지 모조리 똑같은 사건이 2년 전에도 있었다.
2011년 2월 1일, 서울 대현동 신한은행 이대역점을 찾은 김모(51)씨는 10억원짜리 수표를 창구직원에게 내밀었다. 김씨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현금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거액을 받은 직원은 수차례 수표 감별기로 확인했지만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일련번호도 진짜였다. 며칠이 지난 같은 달 24일 김씨는 20억원 수표를 들고 같은 지점을 또 찾았다. 이번에도 일련번호는 확실했고, 감별기로 아무리 살펴봐도 진짜 수표로 보였다. 분명 수상했지만 돈을 내주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결국 은행은 김씨에게 현금 2억원과 액면가 2억원 수표 9장을 내줬다.
최근 사건이나 2년 전 사건이나 범인들의 ‘노림수’는 동일하다. 수표 용지와 일련번호만 확실하면 제 아무리 조작을 해도 발각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2년 전 범인들은 은행에서 110만원짜리 수표 두 장을 발급받은 뒤 이 수표의 액면가를 각각 10억원과 20억원으로 바꿨다. 진짜 수표용지에, 진짜 일련번호가 찍혀 있어 은행으로서는 돈을 내주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업그레이드
은행은 비상이 걸렸다. 고작 액면가 110만원 수표 두 장으로 30억원이나 되는 돈을 꺼내간 사실이 알려지자 본격적인 개선작업에 돌입했다. 사건이 일어난 지 꼬박 반년이 지난 후 ‘업그레이드’ 비정액 자기앞수표가 등장했다. 은행은 필요한 수표를 10만원 등 금액이 정해진 정액 자기앞수표, 금액을 정하지 않고 발행한 뒤 은행 자체적으로 금액을 인쇄하는 비정액 자기앞수표로 나눠 조폐공사에 주문을 한다.
전국은행연합회는 2011년 7월 31일 보도자료를 내고 “은행들이 위조나 변조 장치를 대폭 보강한 새로운 양식의 비정액 수표를 9월 1일부터 발행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새로운 비정액 수표는 새겨진 글자의 색상이 각도에 따라 금색에서 녹색으로 바뀌는 색변환 잉크를 쓰는 등 6가지 식별장치를 추가했다. 가장 달라진 점은 ‘1억원 이하’와 ‘1억원 초과’를 아예 다르게 한 부분이다. 1억원을 기준으로 두 수표는 종이의 색과 표기가 전혀 다르다.
방어는 공격에 늘 한 발씩 뒤진다는 얘기가 있다. 지난달 있었던 위조수표 사건의 범인들은 다시 한 번 앞서갔다. 100억원을 뽑기 위해서는 ‘1억원 초과’ 수표가 필요했다. 그들은 1억110만원 수표를 직접 끊었다. 100억원을 위해 1억원을 희생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여기에다 위조방법은 한층 정교해졌다. 2년 전 사건에서는 110만원 수표의 금액과 일련번호를 지웠다 새로 새겨 넣는 복잡한 작업을 거쳤다. 수표 금액과 일련번호를 지운 흔적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들통 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예 금액과 일련번호가 적혀 있지 않은 백지수표를 이용했다.
#투명테이프
경찰 첩보대로 시중에 800억원에 이르는 위조수표들이 풀린다면 어떨까.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이번 사건에 등장한 위조수표 수준이면 어떤 은행이든 똑같이 당한다”고 말한다. 현재 위조방지법과 감별법으로는 최고 수준의 위조수표를 분간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하루빨리 위조수표를 막을 장치나 방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은행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지금보다 정교한 위조방지법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박억선 외환은행 위변조대응센터 차장은 “현재 은행별로 발행하면서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자는 논의가 오가고 있다”며 “발행할 때 발행금액을 쓰고, 그 위에 투명테이프를 붙이기만 해도 이번 사건에 동원한 위조방식은 쓸모없게 된다”고 말했다. 박 차장은 “1980년대 초반까지는 수표를 발행할 때 손으로 쓰고 그 위에 도장을 찍으며 투명테이프를 붙였다. 그때 오히려 위조수표가 적었다. 위조를 100% 막지는 못하겠지만 금액 위에 투명테이프만 붙여도 위조하기 상당히 까다로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삼열 기자 samu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