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이경원] 응답하라 1997

입력 2013-07-05 17:52


“아들, 오늘 류현진 던지는 거 봤나?”

지난 5월, 한 네티즌은 1997년 외환위기에 직장을 잃은 아버지로부터 오랜만에 전화를 받았다며 유명 인터넷 게시판에 소회를 남겼다.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메이저리그 LA다저스 류현진 선수의 경기를 틈틈이 지켜보다 류현진이 선발승을 거두자 동료들에게 점심을 샀다. “류현진 그놈, 박찬호보단 확실히 제구가 좋아. 되게 편하게 봤어.”

아버지는 껄껄 웃었지만 이 네티즌은 수화기 너머에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가 짊어진 고단한 세월이 새삼 떠올라 흐른 눈물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도 박찬호로 힘을 얻으셨던 아버지께서, 지금은 류현진으로 다시 힘을 내고 계십니다….” 담담한 이 고백에 “아버지께 전화 한 통 드려야겠다”는 댓글이 수십개 달렸다.

야구공을 던지는 팔만 왼팔로 바뀌었을 뿐이다. 태평양 건너에서 전해받던 위안은 같은 유니폼과 같은 강속구로 15년 만에 되풀이되고 있다. 일터와 식당, 출퇴근 버스와 지하철, 기차역에서, 삶에 치인 많은 이들이 류현진의 공 하나하나에 아쉬워하고 환호한다. 세계 정상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류현진의 호투는 이들에게 귀한 희소식이다.

이는 구조조정 시대에 박찬호가 맡았던 역할이었다. 류현진이 등판한 메이저리그 경기의 시청률은 꼭두새벽이든 일과 중이든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첫 해에는 부진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류현진이 좋은 성적을 내자 야구용품 매출은 급상승했다. 중계권을 따낸 MBC의 여의도 사옥이 야구팬들의 새로운 명소로 자리매김했다는 기사까지 나왔다. 1세대 선구자의 업적을 넘어설지는 아직 미지수지만, 당시 박찬호·박세리 열풍이 올해에는 류현진·박인비로 이어졌다는 말도 회자된다.

혹시 전부 괜한 감정이입, 값싼 민족주의일 뿐일까. 스포츠에 대한 열광과 실망은 종종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소설가 김연수는 한국 대표팀의 축구경기가 있을 때마다 흑백TV에 시선을 고정하던 아버지에게서 70년대 산업화 세대의 체념을 읽는다. “졌다, 졌어, 진 거야….” 전반전만 끝나면 불안해하는 아버지를 보며 김연수는 “패배자를 만드는 모든 스포츠를 경멸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최강전설 쿠로사와’라는 일본 만화에서는 월드컵을 보던 40대 일용직 노동자가 일본 대표팀의 역전골에 흥분하다 별안간 풀죽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렇게 남의 이름만 외치는 것이 아닌데… 아무리 대단해도 어차피 남의 일인데….”

보다 차가운 시선도 있다. 사회학자 정준영은 ‘열광하는 스포츠, 은폐된 이데올로기’에서 “그럴 듯한 담론의 홍수 속에, 현대인들은 의식하지 못한 채 운동에 대한 강박을 내면화한다”고 통찰한다. 네덜란드의 문화사학자 호이징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포츠는 선정주의로 타락했다”고 비판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는 2007년 신입생 면접에서 “‘오직 바보들만 스포츠를 즐긴다’는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

그래도 류현진에 열광하는 이들을 야구광이나 저열한 민족주의자로만 취급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박찬호와 달리 거액을 받고 건너간 류현진 스스로부터가 그렇듯, 과도했던 국위선양 개념도 이젠 옅어진 상태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청량제가 필요한 한국인의 팍팍한 삶이다. 박찬호가 영웅이 됐던 그때에 비해 우리를 둘러싼 삶은 과연 나아졌는가.

정부는 외환위기와 금융위기를 신속하게 극복했다고 말하지만, 오늘날 한국 경제 곳곳에서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호황을 맞았던 부동산 경기는 끝을 모르고 추락하고 있다. 대출도 자산인 줄 알았던 시절의 만용은 산더미 같은 가계부채로 되돌아왔다. 8년 새 2배로 폭증한 가계부채는 온 국민이 1년간 벌어들인 돈을 모조리 쏟아 부어야 겨우 상환할 수 있는 규모다.

고용시장에서는 비정규직 문제가 여전하고, 고령화 사회로 급변하며 노인 빈곤율은 치솟고 있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구조는 또 어떤가. 0에 가까울수록 소득 분배 불평등 정도가 낮다는 의미의 ‘지니계수’는 1997년 0.264에서 지난해 0.310까지 높아졌다. 상위 20%의 소득을 하위 20%의 소득으로 나눈 값인 ‘5분위 배율’은 같은 기간 3.97에서 5.76으로 뛰어올랐다.

이런 현실 속에서, 류현진이 던지는 공에 시름을 싣는다고 유치하다 말할 수 있을까. 지난달 30일 만난 한 개인택시 기사는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 중계를 봐야 한다며 황급히 ‘빈차’ 불을 껐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들른 과일 노점상은 “오늘 류현진도 잘 던졌는데”라며 덤을 줬다. 공사현장의 아버지에게서 전화를 받은 그 네티즌은 “15년 만에 아버지와 30분 넘게 대화를 했다”며 “류현진이 고맙다”고 했다.

이경원 경제부 기자 neosar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