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정이현의 장편 ‘안녕, 내 모든 것’ 1990년대 중반 세 고교생 성장담

입력 2013-07-04 19:30


소설가 정이현(41·사진)의 장편 ‘안녕, 내 모든 것’(창비)은 김일성이 죽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던 1990년대 중반 서울 강남 반포에서 고교 시절을 보낸 세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김일성이 죽었다. 1994년 7월 9일 정오 북한의 조선중앙방송과 평양방송은 김일성 주석이 7월 8일 새벽 2시 사망했다는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중략)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는 토요일이었으며, 교실을 나와 교문까지 걸었을 뿐인데도 겨드랑이가 축축하게 젖어올 정도로 무더운 날이었다.”(12쪽)

그뿐 아니다. 1990년대는 전두환·노태우 구속, 하이텔 PC통신, 서태지의 음악, 호출기(삐삐), 동전 전화기, 1994년의 폭염 등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던 시절이다. 그 뜨거운 시절의 양철지붕 위에 올라간 듯 부풀어 오른 1978년생 동갑내기 세 명의 청춘이 있었다. 부유층 조부모의 집에 얹혀 사는 사실을 남들에게 숨기고 있는 세미, 반복적으로 욕설을 내뱉는 뚜렛 증후군에 시달리는 준모, 비범한 기억력의 소유자인 지혜가 그들이다.

작가는 셋의 시점을 교차하며 그들이 나누는 한 시절의 우정과 사랑, 쓰라린 성장의 과정을 날렵하고 매끄러운 필치로 그려낸다. 무엇보다도 1980년대를 묘파한 작품 수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1990년대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번 소설의 가치는 매겨질 수 있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되는 해는 1997년이다. 가깝지만 머나먼 숫자였다. 유리잔 밑바닥에 남은 우유 찌꺼기처럼 희뿌옇고 탁했다. 1988년에는 1991년이, 1991년에는 1994년이 그렇게 느껴졌었다.”(63쪽)

셋은 하루하루 스무 살에 접근해가면서 순응도 일탈도 아닌 어정쩡한 방황의 날들을 통과한다. 어른이 되기를 고대하기도, 두려워하기도 하던 그 시절, 그 세대의 성장담은 이런 문장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책의 어떤 페이지에도 밑줄을 치지 않았다. 나만을 위한 빨간 줄을 긋는다고 해서 거기 새겨진 의미들이 내 것이 될 리 없을 테니. 나보다 오래 존재해온 글자들이 이 세계 어딘가 낡은 책장들 속에 납작 엎드려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했다.”(65쪽)

‘나’가 통과했지만 결코 ‘나의 것’이 될 수 없었던 1990년대 풍경들이 이 소설로 인해 다시 우리의 손에 쥐어지는 것이다. 그만큼 1990년대는 현재의 우리를 구성하는 가까운 과거이면서도 충분히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