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전 장관 “쌍방향 시대엔 실용서·인문서 벽 무너질 것”
입력 2013-07-04 19:29 수정 2013-07-04 22:47
한일 대표지성 도쿄도서전 ‘디지털시대, 왜 책인가’ 대담
디지털 시대, 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한·일 양국의 대표적 지성인 이어령(79) 전 초대 문화부 장관과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73) 일본 도쿄대 교수가 4일 ‘2013 도쿄국제도서전’을 계기로 도쿄에서 만나 ‘디지털 시대, 왜 책인가’를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도서전이 열리고 있는 도쿄 빅사이트 전시장 국제회의동에서다. 이 전 장관은 ‘축소 지향의 일본인’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고, 저널리스트 출신인 다치바나 교수 역시 “100권은 읽어야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며 엄청난 다작을 한 저술가다.
이 전 장관은 “돌상에서 책을 집어 들었으니 내 책의 경험은 80년”이라고 농을 한 뒤, “글을 읽을 수 있기 전인 세 살 때부터 어머니가 소리 내 읽어준 책과 처음 만났다. 어머니 몸에서 오는 청각과 시각 등 공감각적 경험의 책읽기야 말로 디지털 시대의 책의 미래와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사람은 책이 노동의 세계와 분리돼 있어 책을 좋아하면 가난하다고 생각했다”면서 “이런 이원론적 선택지 속에 책이 존재했는데, 디지털 시대에는 쌍방향이 되면서 실용적인 책과 생각하는 책의 구분이라는 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전 장관은 한·중·일 인식 차이를 한자 단어를 통해 예로 들었다. 똑같이 ‘공부(工夫)’라고 쓰지만 중국은 여유 시간이 있느냐의 뜻, 한국에서는 영어의 ‘스터디(study)’의 뜻, 일본에선 아이디어의 뜻이라면서 세 나라의 인식을 합치면 멋진 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책은 곧 쉬고 공부하고 생각까지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디지털 시대의 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디지털이 아날로그와의 대립 개념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성취를 담은 디지털, 인간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디지털로 가야 책도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런 ‘디지로그 시대’의 책은 지성 감성을 담은 몸의 언어, 즉 어머니의 언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의 책이 무엇인가를 묻는 게 아니라 미래의 책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토론하는 자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치바나 교수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바람 불다’에 프리뷰를 쓴 에피소드를 책의 방향과 연관시켰다. 일본의 초창기 비행기 제작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이달 하순 상영을 앞두고 최근 시사회를 가졌는데, 시사회 배포 팸플릿에 그의 글이 실렸다.
다치바나 교수는 “겨우 2400자 분량의 원고였지만 글을 쓰기 위해 비행기 관련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읽었다”고 했다. 이는 책이야말로 인류의 면면에 걸친 지적 노력의 산물인 만큼 디지털 시대와 상관없이 그 생명력을 이어갈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다치바나 교수도 한·중·일 간의 지적 통합 노력을 촉구했다. 그는 “한·중·일이 공통의 한자문화권이니 세 나라가 모두 쓰면 좋은 공용 한자 800자를 추출해 이를 자라나는 세대에게 배우게 하면 상호 소통에도 큰 도움이 되고 서양에 맞서 동양 문명을 살찌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 장관도 “그런 움직임을 듣고 얘기에 흥미를 느꼈다. 좋은 생각”이라고 화답했다.
도쿄=글·사진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